용아와 영랑 두 시인의 우정이 깃든 곳
용아와 영랑 두 시인의 우정이 깃든 곳
  • 강진신문
  • 승인 2023.02.13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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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옛 이야기 - 남성리 영랑길 8]
영랑생가를 지키는 은행나무(Ⅱ)

강진군은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강진 이야기를 발굴하고 계승하기 위해 지난 2019년부터 매년 '우리 동네 옛이야기' 책을 발간하고 있다. 책 편찬에는 강진 출신 김옥애, 강현옥, 장미연 동화작가가 글로, 김충호 화백이 그림으로 참여하고 향토사학자 양광식 강진문사고전연구소장의 감수를 받았다.
올해 세 번째 펴내는 강진 이야기 동화책에는 남성리 영랑길의 역사, 문화 이야기 6편을 오일파스텔 삽화와 함께 책에 담았다.
'우리 동네 옛이야기' 남성리 영랑길 편에 가까운 옛날 실존했던 인물들과 유적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내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강진의 역사를 살펴보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사랑채 밖에서 바라본 은행나무

 

 어느 늦은 가을 핏기 하나 없이 해쓱한 얼굴로 찾아온 용아 선생님을 보고 영랑 선생님은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건넸지.

"혹사라……. 허, 이 사람 그런 소리 말게. 역사에 길이 남을 자네의 주옥같은 시들을 후세에 남기는 일을 하는데 혹사라니 당치 않은 말이네. 오히려 영광이지."

용아 선생님이 평소답지 않게 목소리를 키워 넉살 좋게 받아 쳤지. "허, 이 사람이 나랑 지내더니 아주 넉살만 늘었구만 그래."

영랑 선생님은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보이셨지.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어. 호탕한 그 웃음은 불안한 속마음을 숨기려는 것임을. 왜냐하면 용아 선생님이 잠자리에 들었을 때 영랑 선생님이 날 찾아오셨거든. 그리고 밤늦도록 내 둥치를 뱅뱅 도는 거야.

"허! 어쩜 좋단 말인가. 저 친구 모습이 마치 모란 같구나. 고귀한 영혼을 가진 저 친구의 얼굴은 마치 5월 한낮의 찬란한 햇빛을 함뿍 받고 있는 모란 같아. 그런데 말이야. 모란은……."

영랑 선생님은 혼잣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세게 도리질을 쳤어. 그러고는 나를 보며 다짐을 받듯 속삭였지.

"아니다. 아니야. 내가 무슨 끔찍한 상상을 한 건가? 그렇지 않느냐? 용아 저 친구가 그리 쉬이 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 마음을 너무도 잘 아는 저 친구가 가면 나는 누구에게 이 마음을 풀어내고 산단 말이냐? 아니 될 말이다.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제발 제발 다시 건강해졌으면 좋겠구나."

나는 불안해하는 선생님을 위로해드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어. 내가 듣기에도 용아 선생님의 숨소리는 속이 꽉 막힌 대금처럼 아주 거칠었거든.

그러나 불안한 기운은 현실로 다가오고 말았지. 1938년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어느 날(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일부 인용)이었어. 기어이 잔인한 그 소식이 날아오고 말았지. 용아 선생님은  서른다섯이라는 너무도 젊은 나이로 모란처럼 떨어지고 말았단다.

"아! 이게 무슨 끔찍한 일이란 말이냐? 이 어두운 세상에서 그래도 내 영혼을 나누던 유일한 벗이었는데 운명이 어찌 이리도 잔인하단 말이냐? 이런 결말을 예언하려 그런 시를 썼더란 말인가?"

영랑 선생님은 너무도 큰 슬픔에 오랫동안 바깥출입도 안 하셨어. 그리고 늘 손님들로 들끓던 사랑채 대문도 안으로 빗장을 채워버렸지. 너무도 따사로운 5월이지만 그해 5월은 너무도 잔인한 5월이었어.

영랑 선생님과 용아 선생님은 영혼을 교류하는 둘도 없는 친구였지. 뒷날 두 사람의 마음의 지극함을 안 후세 사람들은 광주공원에 쌍 시비도 세웠대. 이런 쌍 시비는 전국적으로 보기 드물다고 해. 그만큼 두 시인의 우정이 지극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겠지.

왼쪽 시비엔 용아 선생님의 시 <나두야 간다>의 일부가, 오른쪽 시비엔 영랑 선생님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마지막 구절이 새겨져 있다고 해. 마치 두 분이 사랑채에서 시 구절을 주고받듯이 말이야.

1938년은 내게도 잊을 수 없는 해였지. 선생님의 시와 대금소리를 들으며 무럭무럭 자라던 어느 날 속이 간질간질거리는게 느껴졌어. 그리고 그해 여름 난 드디어 열매를 매달았단다. 겨우 세 알 뿐이었지만 난 너무도 신기했어. 그런데 나만 신기한 게 아니었나봐. 집안 사람들 모두가 생각보다 빨리 열매가 열렸다며 기뻐했지.

"한 오 년은 더 있어야 열매를 보려나 했는데 이리 빨리 열매를 맺다니 장하구나!" 평소 말수가 적으신 아버님도 내 둥치를 쓰다듬어 주시며 칭찬해주셨지. 난 왠지 부끄러워 살랑바람에 잎을 흔들었어.

"그러게나 말입니다. 저희 집터 기운이 좋은가 봅니다." 영랑 선생님도 한 마디 거들었지. 그해 가을, 아버님, 영랑 선생님, 영랑 선생님 아들까지 삼대가 모여 많지 않은 열매지만 조심스레 땄단다. 그리고 사랑채 마루에 놓고 기뻐하는 걸 보니 내가 대단한 일을 한 것만 같아 정말 뿌듯했어.

"아버지!" 은행 세 알을 바라보고 있던 선생님 아들이 갑자기 선생님을 불렀어. 아마 무언가 궁금한 게 생긴 모양이었지.

"왜 그러느냐?"

"저 은행나무가 올해부터 열매를 달기 시작했으니 내년엔 열매를 열 개쯤은 달까요?" 아들 얼굴엔 호기심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어.

 

"아마 그러지 않겠느냐? 몇 년 후면 나무 전체에 별처럼 매달겠지?" 선생님은 인자한 얼굴로 대답해주셨지. 할아버지께서는 질문 많은 손자가 귀여워 빙그레 웃고 계셨어. 그런데 말이야. 그 꼬맹이의 입에서 나온 말에 모두 한바탕 실소를 터트렸단다.

"그럼 이 담에 그 은행 많이 많이 모아서 할아버지 제사상에 놓을래요." 순간 사람들 입이 다 딱 벌어졌어. 세상에! 요렇게 맹랑한 녀석이 또 있을까? 세월이 강물처럼 흐르고 흘러 난 이제 별처럼 많은 열매를 매다는데 영랑 선생님도, 그 맹랑한 말을 하던 꼬맹이 아들도 다 어디로 간 걸까?

1945년 아침 저녁으로는 조금씩 찬 기운이 돌고 잎들도 초록빛이 조금씩 바래가던 어느 늦은 여름날이었어. 웬일로 집안 사람들이 사랑채 누마루에 모두 모여 라디오 방송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지. 라디오에서 나오는 잡음은 그날따라 유난히 지지직거려 도통 무슨 보도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 그런데도 누구 하나 짜증내는 말 한마디 내지 않고 있었지. 한참 집중해서 듣고 있는데 나이 많은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 들릴 듯 말 듯 뭐라고 뭐라고 우는 듯한 소리를 내는 거야. 가만히 들어 보니 그건 수시로 이 집을 감시하던 일본순사들이 하던 일본말이었어.

'우리 선생님이 일본 방송을 듣고 있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지?' 나는 또 무슨 대단히 안 좋은 일이 생길까봐 불안해졌지.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봐. 한참 방송을 듣던 선생님 얼굴에 알 수없는 발그레한 기운과 미소가 도는 거야. 쥐 죽은 듯 조용히 듣고 있던 안채 사모님이 답답하셨는지 침묵을 깨고 물었어.

"무슨 소린가요? 전 일본말도 서툴지만 지직거리는 통에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시원하게 얘기 좀 해봐요."

"그래요, 아버지. 아버지가 웃고 계시니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설마 또 뭐 공출을 심하게 하겠단 소리는 아니죠?" 아이들도 궁금해했지.

"공출? 공출이 다 뭐냐? 그 놈들에겐 이제 쌀 한 톨도 주지 않을 거야. 이 땅에 나는 풀 한 포기도 허락 없인 못 뽑게 할 거다."

영랑 선생님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셨지. 그리고 어린애처럼 눈물을 주르륵 흘리시는 거야.
"에구머니나!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들으라고 해! 들으라고 해! 일본이 항복을 했어. 이제 우린 독립이라고!"
"아니, 그 무슨……? 그게 정말인가요?"

모두 두 귀를 의심했어. 너무도 오랫동안 어둠 속에 있던 사람들이라 밝은 빛에 놀라 눈만 끔벅댈 뿐이었지.

"바보들처럼 뭐 하고 있어? 독립을 했다는데. 자, 어서 만세를 불러야지." 영랑 선생님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장롱 속 깊이 감춰두었던 태극기를 꺼냈어. 그리고 버선발로 뛰쳐 나갔지.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선생님은 목이 터져라 외치고 또 외쳤어. 뒤늦게 소식을 듣고 큰길로 나온 사람들이 영랑 선생님의 뒤를 따랐지. 그해 늦여름 강진의 길이란 길은 온통 흰색 두루마기와 태극기 물결로 넘실거렸단다. 아마 무궁화 삼천리가 다 그랬겠지.

독립을 하면 나라가 바로 바뀔 것 같았지만 그러지도 않은것 같아. 독립의 기쁨도 잠시 선생님의 한숨 소리가 가끔 사랑채 밖으로 새어 나오곤 했거든. 가끔 집안 뜰을 거니시며 '나라가 이리 혼란스러워서야…….' 하며 그때는 이미 선생님보다 몇 배는 더 커진 나를 올려다 보곤 했지.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도 너만은 푸르게 쑥쑥 잘 자라는구나. 대견하다." 선생님은 내 아래 그늘에 앉아 대금을 부시다가도 이렇게 칭찬의 말을 던져주곤 했어.

그렇게 3년이 흐르고 1948년이 되었어. 1948년은 내게는 정말 허전하고 슬픈 해였단다. 영랑 선생님이 태어나서 45년을 살던 이 집을 떠나 서울로 이사를 간 해였거든. 45년을 살아온 집이지만 아이들 교육 문제 앞에서는 선생님도 결단을 내릴수밖에 없으셨나봐. 더군다나 광복 이후 나라 사정은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선생님도 자식들의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으셨을 거야. 집안의 세간들을 하나 둘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는 가운데서도 선생님은 뜰 안의 나무들에게 눈길 하나 하나 주며 매우 아쉬워 하셨지.

"내가 가고 나면 이 모란은 누가 아끼고 가꿔줄꼬? 감나무야, 너는 우리가 가도 해마다 추석 무렵이면 또 붉은 잎을 떨구겠지? 저 대숲은 언제나 변함없이 창창하구나. 아, 동백들. 오늘따라 너희들 붉은 꽃송이가 내 가슴 속에서 아픔으로 다시 피는구나."

안채 뒤안과 사랑채 뜰 구석구석까지 다 돌고 난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내게 다가왔지. 난 펑펑 울 것만 같아 선생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어.

"은행나무야, 너도 참 나와 적잖은 세월을 보냈지? 그러고 보니 내가 어른이 된 후로 내 삶을 다 지켜본 이가 너였구나. 너도 참 용아 못지않게 깊은 속을 가진 친구로구나. 유학길에 서 귀국한 후 어린 너를 본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너도 나도 이렇게 나이를 먹었다니 세월 참 빠르지 않느냐?"

영랑 선생님은 감회에 젖어 내 둥치를 쓸어 만졌어.

"이제 보니 둥치도 제법 튼실해졌구나. 열매 세 알 놓고 기뻐하던 때만 해도 네 밑둥치는 고작 뼘으로 셋 하고 반(1938년 <조광>에 실린 글 인용)이었는데 이젠 다섯 뼘이 넘으니 머잖아 이 집을 지키는 터줏대감 노릇을 톡톡히 하겠구나."

'싫어요. 저는 터줏대감 같은 거 되는 것도 싫고 뽐내는 것도 싫어요. 그러니 이 집에서 그냥 같이 사시면 안될까요?' 나는 선생님을 잡아보려고 가지를 뻗었어. 그 바람에 이제 물들기 시작한 은행잎 몇 장이 허공으로 뱅그르르 맴을 돌다 떨어졌어. 영랑 선생님은 그 은행잎을 주워 용아 선생님의 시집 사이에 집어넣었어.

"용아가 지금의 너를 보았다면 뭐라고 할까? 아까운 사람이 너무도 빨리 갔지?" 영랑 선생님은 하늘의 별이 된 용아 선생님 생각에 눈물을 훔쳤어.

'선생님은 용아 선생님처럼 빨리 가시면 안돼요. 멀리 떠나시더라도 부디 건강하세요.' 나는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단다.

"잘 있거라. 조만간에 다시 보러 오마." 영랑 선생님은 그렇게 손을 흔들며 초가을 푸른 하늘빛 아래로 떠나갔어.

나는 영랑 선생님 가족이 떠나시는 모습이 아스라이 사라져 안 보일 때까지 까치발을 하고 지켜봤단다. 너무도 서글퍼 펑펑 울고 싶었지만 꾹 참았지. 내 울음소리에 떠나는 선생님 발걸음이 힘들어질까봐 쨍한 가을 하늘 아래 잎 하나 떨구지 않고 꿋꿋이 서 있었단다. 그런데 2년 뒤 슬픈 소식이 들려왔어. 찬바람이 돌던 10월 초 해거름녁이었어. 날개를 쉬려고 내 둥치에 앉은 까마귀가 그 소식을 전해주었지. 영랑 선생님도 모란처럼 떨어져서 하늘의 별이 되었다는 거야. 조만간 다시 오겠다고 한 선생님의 약속은 지킬 수 없는 바람이 되어 하늘로 날아가 버렸지.

"아! 선생님. 이게 무슨 일인가요? 다시 오겠다고 하셨잖아요. 모란꽃도, 감나무도, 집 앞에 새암(샘의 전라 방언)도 그대로인데 선생님은 어디로 가셨나요?" 난 너무 슬퍼서 엉엉 소리 내어 울었어. 대숲을 흔들던 선생님의 서글픈 대금 소리도 이젠 다시는 못 들을 거라 생각하니 더 눈물이 났지. 하지만 난 믿어. 선생님의 따뜻한 시심은 해마다 찬란한 슬픔으로 다시 피어날 거라는 것을. 나는 그때를 위해 삼백예순 날이고 칠백예순 날이고 기다릴 거란다.(영랑 시. <모란이 피기 까지는> 마지막 구절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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