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돌탑 그리고 소통
[다산로] 돌탑 그리고 소통
  • 유헌 _ 시인·수필가
  • 승인 2023.02.13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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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헌 _ 시인·수필가

계곡을 오른다, 경포대 계곡을 거슬러 올라간다. 유독 돌이 많다. 길가에도 길바닥에도 돌이 널려 있다. 계곡에도 돌들이 깔려 있다. 큰 돌 작은 돌 넓적한 돌 뾰쪽한 돌 모양도 가지가지이다. 세상 어디가나 돌은 있지만 월출산엔 특별히 돌이 더 많은 것 같다. 돌멩이가 아니라 바위가 넘너른하다. 그래서 월출산을 악산(惡山)이라고 하나보다.  
 
월출산은 강진과 영암에 걸쳐 있다. 월출산의 남쪽은 강진, 북쪽은 영암이다. 그래서 내가 사는 동네 이름이 월출산의 남쪽, 월남리이다. 들판에 우뚝 솟은 돌산 월출산은 설악산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산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월출산은 기(氣)가 센 산으로 유명하다. 조선 최고의 인문지리학자이자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월출산을 화승조천(火乘朝天)의 지세(地勢)라고 표현했다. '아침 하늘에 불꽃처럼 내뿜는 기를 지닌 땅'이 월출산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월출산은 기암괴석, 첩첩 암봉의 산이다. 그걸 보고 유배길의 정약용은 영암에서 강진으로 넘어오는 누릿재에서, 월출산이 고향 도봉산을 닮았기 때문에 "월남리로 고개 돌려 월출산을 보지 말라"고 노래하지 않았던가.  
 
돌이 많은 월출산은 예부터 신령스러운 산으로 여겨져 왔던 것 같다.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삼국사기 제사조에 국가 지정 소사(小祠)로 월출산을 기록하고 있으니 말이다. 통일 신라 초기에 이미 소사로 지정됐고, 부족국가인 마한 시절부터 산신제를 올렸을 것이라는 설도 있는 걸 보면 명산 월출산의 명성은 천 년 전으로 올라간다. 월출산에서 산신제를 지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뿐만 아니라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찾을 수 있다. 천황봉 정상 표지석 바로 옆의 월출산 소사지(小祀址) 비석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산의 역사 때문일까. 천황봉 오르는 등산로 갓길의 돌탑에 눈이 더 간다. 돌탑 구석구석에 눈길이 머문다. 누가 쌓았을까. 어떤 마음으로 돌멩이 한 장 한 장을 갖다 얹었을까. 천 년 전 천황봉 가는 길가의 돌탑 앞에서 어떤 기원들을 했을까. 아득한 세월 너머의 그들이 오늘 나의 모습과 겹쳐 지나간다.      

모난 돌 올려놓고 잔돌 하나 괴주니, 차갑게 등을 기댄 위 아랫돌 틈새에, 온돌방 구들장처럼 온기가 흐르더라
-유헌, 「돌탑 쌓기」 전문

인간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 세상에는 모난 사람도 있고 둥글둥글 성격 좋은 사람도 있다. 더 가진 자도 있고, 덜 가진 이도 있다. 부족하면 채워주고, 가슴 시린 사람은 보듬고 가야 함께 멀리 갈 수 있다. 극과 극의 사회, 모난 돌과 모난 돌 사이의 잔돌처럼 수평을 잡아주는 사람, 냉기를 녹여주는 따듯한 바람 같은 사람이 그리운 이즘이다.   
 
돌탑은 여기저기 있다. 어찌 보면 흔한 게 돌탑이다. 자드락길마다 마치 이정표처럼, 수호신처럼 돌탑이 서있다. 돌탑은 쌓기도 쉽다. 굴러다니는 돌멩이 몇 개 주워 차곡차곡 놓으면 탑이 된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작은 돌 하나씩 올려놓고 가니 짓다 그냥 둬도 된다. 삐딱할 땐 잔돌 하나 괴주면 된다. 
 
우리 집 마당에도 돌탑이 있다. 동백나무 아래, 은목서 그늘에, 강진 5일장에서 오래 전에 구입한 섬잣나무 옆에도 돌탑이 서있다. 그들은 지난 가을의 태풍에도 올 겨울의 폭설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이처럼 돌탑은 웬만한 비바람에도 끄떡없다. 돌의 무게가 서로를 지탱해주고, 위 아랫돌 틈새에 바람길이 나있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꽉 막힌 세상, 돌탑의 바람길에서 소통의 미학을 읽는다. 맞바람 비켜서 적당히 길을 내주는 여유, 호젓한 산길에 서있는 작은 돌탑에서 그 지혜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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