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설날에 펼쳐보는 고조부님 유훈서
[기고] 설날에 펼쳐보는 고조부님 유훈서
  • 윤영갑 _ 작가, 자유기고가
  • 승인 2023.01.17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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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갑 _ 작가, 자유기고가

민족 고유의 대명절인 설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 설은 음력 정월 초하룻날로 대개 한 해의 첫날을 뜻하는 말이다. 설은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 첫 아침을 맞는 명절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새로운 기분과 기대를 가지고 명절을 맞는다.

설이라는 말의 유래는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고 있다. 다만, 설에 관련한 기록은 삼국시대 삼국사기에는 백제에서는 261년에 설맞이 행사를 하였고, 신라에서는 651년 정월 초하룻날에 왕이 백관들의 새해 축하를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설은 일제 강점기에 양력을 기준으로 삼으면서 강제적으로 쇠지 못하게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오랜 전통에 의해 별 실효가 없었고 1985년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정하여 공휴일이 되었다가 사회적으로 귀향 인파가 늘어나면서부터 본격적인 설날로 다시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번 설에는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귀성객이나 이들을 따뜻하게 맞은 형제들이 자신의 뿌리를 되새겨 보고 핏줄의 중요성과 고향의 따스함을 마음속 깊이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를 바라면서 나의 고조부님께서 남기신 유훈을 되새겨 본다. 이 유훈서는 고조부가1913년 77세(1820년 83세로 사망)때 후손들이 두고두고 볼 수 있도록 당시 족보 맨 뒤에 직접 써놓은 글로 우리 집안의 가훈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훈서 복사본

 

- 우리 조상은 대대로 도암 지석리에서 살아왔으며 그곳에는 조상이 일구어 놓은 유물과 세간, 발자취가 남아있고 조상의 영혼이 깃든 곳이니 자손들은 그 땅을 감히 소홀히 하지 말아라.(自先代以來世居支石累代巾衍邱壟在於支石里前後麓則此地先祖杖屨逍遙之處尊靈陟降之地也爲其子孫者豈敢慢而忽之哉)

- 검소함을 스스로 지키고 올바른 의를 알며 부정한 물건이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儉自守敎之以義方妖怪之物不入於家爲)

- 우리 두 형제가 후손들의 관혼제례시 유용하게 쓸 수 있도록 계를 만들어(愛恭契,1862년) 선조 묘지와 제수를 봉하였으니 후일 여유가 있을시 후손들끼리 관혼상제 시 부조하고 후손들이 한데 모이는 섣달 그믐날 과세와 여름 복달음에 쓰되 후손들 간 서로 도울 일이 있으면 조상의 뜻을 어기지 말고 절약하여 시행하라.(吾家盛門孤族修契無欠儲畜而先置墓土謹封三代祭需次及冠婚喪祭無不輔用或有余貨吾兄弟与稱子弱孫或除夜或煮伏四礼尤先輔用余外或有相助処則署署減用不役祖)

- 가문의 흥망은 가르치느냐 가르치지 않느냐에 달렸으니 자식의 가르침에 힘쓰되 스승을 잘 택하여 가르치고 이왕 가르쳤으면 성공할 수 있도록 가사에 간섭하거나 세상의 복잡한 일에 정신 팔지 않도록 해 주어라.(家道興廢在於敎與不敎敎子擇師入學有不敎敎之不以家事幹攝而期於必成不以世俗雜事亂其心志相與敦睦總服如一室則)

- 후손들은 이러한 조상의 유훈을 대대로 받들고 지켜서 그 뜻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빛나게 할 것이며 이 유훈을 보첩 뒤에 기록해두니 종이에 쓰여진 평범한 글귀로만 생각하지 말기를 이 늙고 쇠약한 몸이 바라고 또 바라며 1913년 여름 눈물 닦으며 쓰다(余以此訓附干譜末若等勿謂紙上例談而永守勿替以副衰翁眷眷之意是所深望 歲昭陽赤奮若季夏鵬植牧弟而記).

예전의 농경사회가 산업화와 핵가족, 정보화시대를 거치면서 조상의 의미를 잃고 또 조상의 얼이 숨어있는 재산이 도리어 화근이 되어 서로가 등지게 되는 경우를 보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고 외면하는 어리석음이라는 질타와 함께 왠지 역사의 수레바퀴가 잘못 굴러간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데 나만의 생각 아닐 것이다.
 
흔히 요즈음을 사촌이 없어지는 시대라고들 한다. 형제자매가 없는 외동아들 딸이다 보니 백·숙부가 없고 이모·고모가 없어지는 세상이다. 이러다간 호칭마저 사라지는 게 아닌가 걱정된다. 조상의 존재마저 잃고 조상에게 욕되더라도 나만 편하면 된다는 오직 나밖에 모르는 사회로 심화되어 가는 것만 같은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자본주의 물결이 생활 깊숙이 파고들고 황금만능주의가 만연되면서 오직 나밖에 모르는 아집과 돈이면 뭐든지 된다는 사고방식이 형제자매끼리 오랜만에 만나 대화를 나누고 조상의 음덕을 기려야 할 뜻 있는 날을 오히려 형제간의 화목을 깨뜨리고 돌아올 수 없는 반목의 날로 만들어버리는 사례를 언론을 통해 접하게 된다.
 
설을 앞두고 다시 한번 펼쳐보는 고조부님의 유훈은 우리 집안의 훈육교과서 역할을 해 온 것으로 내가 어렸을 적 할아버지께서 매일 읊조리셨고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도 우리 5형제를 모아놓고 늘 따라 읊도록 강요(?)하셨던 글이다. 어릴 적에는 그게 무슨 뜻인지도 잘 몰랐고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었는데 이제 나이들고 보니 고조부님의 유훈이 우리 가문을 지켜온 버팀목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설날! 모처럼 집안의 어른과 형제자매가 모이는 날. 이번 설날은 대체 연휴까지 끼어있다. 사사로운 욕심을 버리고 눈앞의 조그마한 이익에 얽매이지 말고 조상의 유훈들을 공유하는 시간이었으면 한다. 우리 모두의 조상들은 후손들이 화목하고 돈독하게 지내 오직 가문이 번창하기 소망했던 그 정신세계로 들어가 보았으면 한다.
 
조상을 찾는다는 것, 과거를 되돌아보게 되는 과정에서 뿌리 없는 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코로나 이후 오랜만에 모이는 만큼 온 가족이 둘러앉아 가계도라도 그려보며 뿌리를 알고 조상의 소중함을 되새겨는 보는 그런 의미 있는 설 명절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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