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어머니의 바쁜 하루
[다산로] 어머니의 바쁜 하루
  • 강진신문
  • 승인 2022.11.28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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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권 _ 수필가

코로나19 확산으로 일상에 많은 불편을 겪고 있다. 특히 요양원에 계시는 고령자들이 가족과 만남이 제한된 가운데, 망연자실(茫然自失)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방영된 TV 화면을 바라보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

구순을 눈앞에 둔 어머니는 몇 년 전 허리수술 후 회복되어 마을 회관과 집을 오가며 활기차게 살고 계신다.

어머니는 나이가 들면서 독특한 습관이 생겼다. 쓰고 남은 물건을 검정비닐봉투에 담아 기둥 또는 벽에 빼곡히 걸어 두는 것이다. 청소를 하다보면 봉투 속에 넣어 둔지 오래된 과자는 눅눅해져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종자로 파종하려고 신문지에 돌돌 말아서 봉지에 넣어 둔 콩. 파. 들깨는 수분이 바짝 말라버렸다.

나는 어머니 집에 가면 가장 먼저 혈압 약을 매일 잘 복용하고 계시는지, 냉장고 문을 열어 유통기한이 지난 식재료와 맛이 변질된 음식이 있는지 살피고, 집 안팎을 돌면서 밤길을 걷다 걸려 넘어질 만한 물건이 없는지 확인한다.

마지막으로 여기저기 걸어 놓은 검정비닐봉투 내용물을 확인한다. 지난번 들렸을 때에 깔끔히 치웠는데도 새로운 검정 비닐봉지가 여기저기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어머니 제발 비닐봉지에 담아 두지 마세요."
"봉투에 담아 두시려면 투명한 비닐봉투에 담아 두세요,"
"검정봉투는 속에 뭣이 들었는지 보이지 않잖아요."
"그래 알았다."

우리 어머니 하루일과는 참 바쁘시다. 아침식사를 드시고 경로당에서 동네 사람들과 함께 지내다가 그 곳에서 점심과 저녁을 먹고, 날이 저물면 집으로 돌아와 TV를 켜고 연속극과 뉴스를 시청하고 주무신다. 다음 날 다시 경로당으로 가신다. 그리고 열흘에 한 번 정도 관절에 주사를 맞으러 버스를 타고 읍내 병원을 다녀오신다.

신혼 시절부터 함께 농사를 짓고 마을을 지키며 살던 사람들과 함께 지낸다. 오늘도 고관절이 손상된 아랫마을 아주머니의 일손을 거들어 주고 오셨다고 한다. 이제 당신이 동네에서 여섯 번째로 연장자라면서 먼저 돌아가신 어른들 택호를 부르며 손가락으로 세어 본다.

인간 평균수명이 길어지면서 불청객 치매가 삶을 힘들게 한다. 나이가 들면 혈관성 치매보다 뇌 속 신경세포가 서서히 죽는 퇴행성 신경 질환 알츠하이머병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어머니는 요즘 들어 금방 사용했던 물건도 어디에 두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며 속상해 하셨다. 혹시 치매 초기증상이 아닌가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서둘러 보건소에서 진단을 받았는데 건망증이라 해서 마음이 놓였다.

현대사회의 재앙이라고까지 일컫는 치매를 예방하려면 혈압, 콜레스테롤, 혈당, 체중, 심혈관질환 등 위험요소를 줄여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운동과 그림그리기 등 취미생활을 지속적으로 하면서, 심장에 좋은 음식을 섭취하고 친한 사람들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많이 보내야 한다고 한다.

어머니는 종갓집 맏딸로 자라면서 정규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다. 문맹이었지만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경과 찬송가를 어찌나 간절히 들여다봤던지 문득 한글을 깨우치셨다. 한글을 더듬더듬 읽기는 하지만 쓰지는 못했다.

경로당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선생님이 찾아와 한글 공부를 가르치셨다. 이젠 한글을 네모 칸 속에 또박또박 예쁘게 잘 쓰신다. 어머니 방청소를 하면서 침대 밑에 넣어둔 한글쓰기 노트를 발견 했다.

"오매 우리 형제가 명필이란 말을 듣는 것은 어머니 필체를 닮았었구먼,"
"이리주거라 늙은이가 글씨 쓰는 것이 자랑이냐?" 수줍어하시며 말했다.

외할머니는 손 맵시가 야무지고 빈틈없는 성격으로 무속신앙을 지성으로 섬겼다. 집안에 큰일을 앞두면 점괘를 보거나 무당을 불러 마당에서 굿판을 벌이곤 하셨다. 그런데 애지중지하던 큰딸이 결혼하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알게 된 외할머니는 딸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모녀간 절교 단계까지 이르렀으나 딸의 확고한 믿음을 꺾을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신실한 믿음생활을 지켜보며 자랐던 삼형제 중 둘째인 내가 장로가 되는 날이다. 어머니는 말썽꾸러기였던 작은 아들 장로임직 때 오셔서 활짝 웃는 얼굴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모처럼 어머니께 큰 선물을 안겨드린 것 같아 내 마음도 흐뭇했다.

나는 아들 셋 중 성격이 가장 고집스럽고 억세서 청개구리처럼 살았다. 어머니는 나를 향해 "내가 자식 다섯을 더 키우고 말지, 너 같은 자식은 더 못 키우겠다."고 푸념도 하셨다.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는 차가운 겨울이 다가온다. 육십 대 중반에 접어든 둘째 아들은 비오면 개울가에서 울어대는 청개구리 같이 만시지탄(晩時之歎)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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