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한 사나흘 새와 겨루다
[다산로] 한 사나흘 새와 겨루다
  • 유헌 _ 광주전남시조시인협회 회장
  • 승인 2022.10.04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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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헌 _ 광주전남시조시인협회 회장

때라는 게 있다. 때는 어떤 순간이나 부분을 이르기도 하고 더 넓게 생각하면 시절일 수도 있겠다. 때를 놓친다는 건 기회를 잃는다는 말로 통하기도 한다. 그래서 때를 잘 맞춰야 한다고 말한다. 타이밍(timing)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타이밍이 때맞춤이기 때문이다.  

시골로 이사 온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월출산 자락에 한옥을 지었으니 도회 사람들 말을 빌리자면 전원생활일 수 있겠다. 마당에 잔디를 깔고 담장 아래 나무도 심었다. 단감과 대봉감 나무는 두 그루씩이나 심었다. 겨울이 지나면 앙상한 가지에 파릇파릇 새움이 돋기 시작한다. 초봄엔 새순이 얼굴을 내밀며 수줍어한다. 연둣빛 감잎에 내려앉은 햇살은 또 어떠한가. 한없이 부드럽고 따스하다. 봄바람을 불러 모은다.

그 여린 잎새에 신록이 짙어가는 5월 중순이 되면 가지마다 감꽃이 피어난다. 노란별을 닮은 감꽃을 내가 사는 전라도에서는 감똥이라고 부른다. 그 달짝지근한 감똥을 주워 먹고 나는 자랐다. 그 땐 감꽃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걸고 다니며 한껏 멋을 부리고 다니는 애들도 많았다. 모두 다 때가 선물한 소중한 추억들이라 할 수 있겠다.

감꽃받침에 맺힌 작은 감이 제법 토실토실해질 쯤이면 비바람이 몰려온다. 태풍이 한차례 휩쓸고 도망간다. 풋감들이 우수수 목숨 줄을 놓아버린다. 무성한 그늘아래 가부좌를 틀고 앉은 땡감들. 떫은맛 그대로인데 누군가 다가온다. 구멍 송송 뚫려버린 앙가슴 그 사이로 찬바람이 지나간다. 개미행렬이 걸어간다. 어느새 샛길이 되고 한 끼의 밥이 된 땡감들. 비록 풋감이지만 누구에게는 한 끼의 양식이 되기도 한다.

그 감이 익어가는 계절이다. 인간의 손길과 몇 차례의 태풍을 피해 살아남은 감들이 햇살에 물들며 익어간다. 문제는 이때부터다. 소리 없는 전쟁의 서막이 열리는 것이다. 노을빛 감나무 등불 아래서 벌여야 하는 까치와의 전쟁. 치열한 수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맛이 들기를 기다리다 보면 까치가 먼저 쪼아 먹기 일쑤다. 붉은 물이 살짝 비치면 벌써 까치가 덤비니 어떻게 할 방도가 없다. 가지 끝에 비닐봉지를 걸어 위장막을 쳐도 소용이 없다. 요즘은 새 쫓는 독수리 연이 인기가 있는 모양인데 그걸 집에다 띄울 수도 없는 일. 언제 어디서 지켜보는지 익어가는 그 부분만 골라 톡톡 쪼아 먹으니 이런 낭패가 없다.

앞집 소나무 가지에 걸터앉아 입맛을 다시고 있는 까치를 바라보며 그냥 헛웃음을 짓는 날이 많다. 선수를 칠 것인가, 기다렸다 곱게 딸 것인가. 가을날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새의 감각은 아주 특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홍학의 청각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수백 킬로미터 밖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감지하여 산란을 위한 습지가 그곳에 생겼음을 알아차릴 정도라고 하니까 놀라울 따름이다. 위쪽과 뒤쪽을 파노라마처럼 볼 수 있는 새가 있는가 하면 2개의 눈 중 하나는 먹이를 찾는 데 쓰고 다른 하나는 포식자를 감시하는데 사용하는 새도 있다고 한다.

자외선을 볼 수 있는 조류까지 있다고 하니 우리 인간이 어찌 새를 이길 수 있을까. 애당초 새와 대결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새들도 염치가 조금은 있는 것 같다. 그들이 쪼아 먹다 남은 감을 따서 나무 밑에 두면 우선 그것부터 먹어 치우니 말이다. 그러는 사이 내가 봐둔 감은 익어간다. 내가 무슨 생계를 위해 큰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조금씩 양보할 때도 된 것 같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자연과도 나누면서 살아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그간 잊고 살아 온 것 같다.

대결보다는 함께 갈 때 더 멀리 갈 수 있다. 적당히 져주면서 살아가는 연습을 해야겠다. 지금 소나무 가지에 앉아 나를 쳐다보고 있는 저 까치를 이해하고, 마당의 참새들과도 서로 안부를 주고받으며 살아갈 때 나의 산골 생활 재미는 더 쏠쏠해질 것이다. 자연스럽게 사는 일, 늦었지만 다시 지금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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