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내 인생에서 가장 듣기 좋았던 소리
[기고] 내 인생에서 가장 듣기 좋았던 소리
  • 김점권 _ 전 포스코건설 중국지사장
  • 승인 2022.09.13 09: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점권 _ 전 포스코건설 중국지사장

살아온 과정 중 가장 듣기 좋은 소리는 무엇이었을까? 명절을 앞두고 불현듯 어릴 적에 들었던 아름다운 그 소리가 생각난다.

그 소리를 정리해 볼까 한다. 마음속의 그리운 소리다. 가장 듣기 좋았던 소리는, 모내기 철을 앞두고 가뭄 속에서 연일 애타는 가운데, 어느 새벽녘에 쏟아지는 봄비 소리다. 그 얼마나 가슴 조였던가?

사실 농사 몇 마지기도 안되는 소농이었지만, 모내기 철에 논바닥에 물이 철철 넘쳐도 부족한 시점에, 겨우 물 좋은 논바닥에만 물이 조금 남았고 천수답에는 먼지만 풀풀 날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파란 하늘 쳐다보시며, 풍년초 말아 피시며 한숨짓는 아버지의 모습에 덩달아 가슴이 무너졌다.

거참, 금년 수업료는, 수학여행은 갈 수나 있을런 지 어림도 없겠다. 그렇게 가슴 태우던 어느 6월 중순, 이제 1주만 비가 오지 않으면 금년 벼농사는 파장이라는데, 어슴푸레 꿈속에서 비가 쏟아지고 있다. 세찬 비는 금방 냇가를 채우고 논바닥에 가득 찬다. 꿈인가, 현실인가? 이불을 박차고 나선다. 실제로 세찬 비가 당차게 내리고 있다.

부모님의 얼굴에는 환희의 모습이다. 땡잡았다. 그 단비, 마른 마당을 때리고, 대나무 잎사귀에 후드득거리며, 초가집 지붕을 때리는 세찬 빗소리,쏴아, 쏴아아, 후두득, 후두득... 정말 듣기 좋은 소리였다.

두 번째는 고대하고 고대했던 명절날, 추석 준비로 시장 가신 부모님이 해가 지고 밤은 깊어 만 가는데 오시지 않고, 기다리다 지쳐 잠든 사이 어렴풋이 들리는 누렁이가 반갑게 짖어대는 소리, 컹컹컹... 어찌 그리 반갑고 정다운지 모른다. 과연 내 옷, 신발은 어떤 색깔일까? 너무 크지 나 않을까? 이제 확인하면 된다. 누렁이 짖는 소리에는 반가움이 넘쳐나고 있었다.

세 번째는 우리 부모님은 부부 싸움이 잦았다. 그것도 꼭 명절이나 소풍 등 무슨 행사만 있으면 냉전이시다.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들 몫이다. 명절 음식은 제대로 먹을 수 있을지, 소풍 점심은 제대로 챙겨 갈 수 있을지. 행사 전야의 그 밤은 불면의 밤이다.

제발 좀 화해하시길, 이불 속에서 생각나는 모든 신에게 얼마나 빌었는지 모른다. 아 그런데, 아침 일찍 잠결에 들리는 두 분의 도란거리는 담소와, 엷은 웃음소리, 그리고 식기와 가마솥 뚜껑 부딪히는 소리, 드그럭, 드그럭, 쨍그랑, ㅎㅎㅎ... 이보다 더 행복한 소리가 있겠는가?

네 번째는 긴 긴 겨울날 배는 고픈데, 밥은 부족하여 어머니께서 고구마를 삶으신다고 한다. 고구마를 씻고 가마솥에 넣고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배는 점점 고파오고, 부엌에 종종걸음 하기를 몇 번이던가? 아, 이제 고구마 익는 소리가 들린다. 그 무겁던 가마솥 뚜껑이 증기압에 의해 들썩거리면서 풀풀풀, 덜커덕 덜그럭 거리는 것이다. 구수한 고구마 냄새와 솥뚜껑 부르릉 거리는 소리, 이미 배는 고프지 않았다.

다섯 번째는 긴 겨울날 새벽녘 잠결에 들리는 마구간의 소 여물 되새김 소리와 쇠 방울 소리 울림이다. 우리 집에는 아픈 과거가 있었다. 농촌에서 소농에 암소 한 마리는 재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어느 날 그 암소를 잃어버렸다. 아마도 누군가 훔쳐 간듯하다.

집안은 풍비박산되었고, 그 이후 수년 간 소를 장만하지 못했고, 모으고 모아서 다시 장만한 황소 한 마리, 우리 집 보물이었다. 잠자다 하루 저녁에도 몇 번 씩 확인해야 마음이 놓였다. 확인은 잠결에 들려오는 소 트림 소리와 쇠방울소리다. 아주 기분 좋은 자장가인 셈이다.

여섯째는 명절, 소풍, 운동회 등 행사를 앞두고, 과연 내일 아침은 정상적으로 올 것인가? 혹시 비는 오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느라 잠 못 이루고, 자다가 깨기를 몇 번이던가, 하얀 창호지 색깔은 아직도 시꺼멓고 밤은 깊었다. 그러다가 깜박 잠들었지. 잠결에 어렴풋이 들려오는 수탉 회칠치는 소리, 부산한 참새 소리, 짹짹짹, 후루륵.. 아, 아침이다. 문지방을 넘어서니 하늘은 파랗고 우리들의 세상이다. 그 반가운 참새들의 노랫소리는 평생 잊을 수 없었던 아름다운 새소리였다.

일곱 번째는 고즈넉한 겨울날, 하얀 눈은 펄펄 내리고 주변은 고요한데 대나무 가지에 쌓인 흰 눈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풀썩 풀썩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눈 개인 파란 하늘에 초가집 지붕 위에 쌓인 눈발을 타고 똑똑 떨어지는 고드름 낙수 소리, 한가롭고 그윽하였다. 문득 소주 한 잔이 그리웠다. 이제 어른이 돼 가는 것이었다.

어른이 되고 사회생할, 가정을 가지면서 들었던 행복한 그 소리, 엄격한 상사로부터 불쑥 들은 칭찬 한마디, '생각보다 참 잘했네,' 또 어느 한 선배로부터 들은 '나는 자네가 그 일을 해 낼 줄 알았어'라는 과찬, 무언가를 잘못해서 마음속으로서 전전긍긍하는 나에게 '뭐, 나도 그런 실수 종종 하는데, 뭘 그렇게 신경쓰나?'라는 대범한 상사의 한 마디, 별 볼일 없는 남편에게 ' 그 정도면 잘 한거야.' 라고 위로하는 아내의 한마디, 참 듣기 좋은 소리였다.

인생, 뭐 별거 있는가? 나라는 우주 속에서 자기 것에 만족하고 행복해 하면 그것이 천당 아니겠는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