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역지사지(易地思之)
[기고] 역지사지(易地思之)
  • 이선옥 _ 신전면
  • 승인 2022.08.29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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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옥 _ 신전면

이를 여덟 개 뽑고 요리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되도록 칼로 잘게 다진다. 오래오래 푹 삶는다. 작년 1월부터 시작된 치아 공사는 3년의 긴 여정을 거쳐야 완공이 된다고 한다.

20여 년 전부터 치주염과 시작된 싸움은 마침내 모든 이를 거의 상실할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나라 5, 60년대생들의 치아가 제일 허술한 것은 그 시대의 사회적 치위생 환경이 열악했기 때문이라는 보고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을 핑계 삼고 싶지 않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적 요인이 커서다.

음식이 아삭아삭 씹히는 소리로 쾌감을 느끼는 별난 취향을 가진 나로선 씹는 즐거움을 상실했으니 삶의 낙을 꽤나 잃은 셈이다.

가까운 가족들과의 식사를 제외하고는 밥 한 끼 먹자는 말에도 손사래를 친다. 다른 사람과 속도 맞추기도 힘들고 음식을 먹다가 흘리는 것도 여간 창피한 일이 아니다.

원래 밥 먹는 시간이 10분이면 충분한 남편은 내가 치아 공사를 한 날부터 천천히 먹기 훈련에 돌입했다. 집에서 밥을 먹을 때는 남편이 빨리 먹고 자리를 떠도 혼자 차분히 먹을 수 있어서 문제가 없지만 부득이한 일로 외식을 해야 할 때는 같이 보조를 맞추지 않으면 내가 다 먹을 때까지 멍하니 앉아 기다려야 한다.

숱한 세월 밥 먹던 습관이 하루 이틀에 고쳐지겠는가? 아무리 천천히 먹는다고 해도 삼사십 분을 먹는 내 속도에 맞추지 못하고 빨리 먹고 일어설 때도 있다. 성질 급한 나도 마음이 불편해서 대강 몇 숟가락 떠먹는 시늉만 하고 골이 나서 일어나고 만다.

'좀 천천히 먹어주면 안 될까? 자기가 먼저 일어나면 난 혼자 먹기가 얼마나 불편한지 알기나 할까?' 이런저런 불평들이 뱃속으로 가라앉던 음식물을 목구멍까지 다시 끌고 올라온다. 이럴 때는 내 입맛에 맞춘 싱거운 음식을 먹다가 맵고 짜서 입맛을 돋우어 주는 외식으로 먹는 재미를 즐기는 남편의 취향을 묵살하고 싶기도 하다

무엇을 먹으면 잘 씹히고 입맛도 나아질까? 마트를 맴돌다가 취나물 한 봉지를 골랐다.

'푹 삶아서 들깻가루 듬뿍 넣고 된장에 무치면 밥이 저절로 술술 넘어가겠지. 두부도 노릇노릇하게 기름으로 구워 먹어야지. 호박도 바지락살을 넣고 볶으면 보들보들하겠지'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 식재료를 골라 장바구니에 담았다.

구겨졌던 기분이 약간 펴진 것 같다. 때를 지난 취나물은 아무리 푹 삶아도 좀체 무르지 않고 지푸라기처럼 질기게 씹힌다. 초록색 나물이 거무튀튀하게 변할 때까지 오래 삶았더니 찌꺼기를 뱉어내지 않아도 될 정도로 물컹해졌는데 취나물의 맛과 향은 온데간데없다.

문득 오래전 일이 떠오른다. 시어머니는 시금치 무침을 좋아했다. 겨울이 막 접어들어 첫서리를 맞은 시금치가 맛이 좋다고 하던 어머니는 된장과 참기름을 듬뿍 넣어 시금치 무침을 만들었다.

어찌나 푹 삶았는지 시금치 맛은 다 빠져나가고 물컹하게 씹히는 게 참기름 향에 홀린 입맛을 망쳐 버렸다.

"어머니, 시금치는 제가 삶을게요"

나는 끓는 물에 시금치를 넣고 10초쯤 지난 뒤 뒤집어서 다시 10초 후에 찬물에 헹궈 냈다.
굳이 양념을 많이 하지 않았어도 달착지근한 맛과 향이 입맛을 사로잡았다.

"어머니, 드셔보세요. 시금치는 아삭거리게 삶아야 맛있잖아요?"

어머니는 시금치 무침을 한 가닥 입에 넣고 계속 오물거리고 있을 뿐 말이 없었다. 70대 중반의 어머니는 그 무렵 틀니를 끼고 있었다. 그때 내 이는 돌을 씹어도 끄덕없을 만큼 단단했지만 어머니의 불편함을 헤아리지 못하는 속이 덜 익은 나이였다.

어머니가 삶았던 시금치 무침보다 더 물컹한 취나물에 들깻가루를 듬뿍 넣고 된장과 참기름으로 맛을 냈다. 계획한 대로 저녁 밥상엔 물컹하고 부드러운 반찬들이 가득하다. 점심에 곯았던 배를 채우느라 내 젓가락이 제법 바쁘게 움직인다.

"당신 밥 먹는 속도가 나보다 더 빠른데? 천천히 먹어"
남편의 말에 밥그릇을 들여다보니 남편의 밥은 반이 훨씬 더 남았는데 내 밥그릇은 거의 다 비워져 있다. 

"당신 왜 오늘은 속도가 늦어요?"
"당신이 옛날에 만들어 준 아삭한 시금치 무침이 생각나서"  

그러고 보니 이가 멀쩡한 남편에게서 아삭함과 쫄깃함 고소함의 식감을 한꺼번에 빼앗아 버린 꼴이 되었다. 남편의 젓가락질이 오늘따라 안쓰러워 보인다.

번거롭더라도 남편의 입맛에 맞는 요리를 따로 해야겠다. 조금만 길들여지면 번거롭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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