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이맘때면 외갓집이 그립다
[다산로] 이맘때면 외갓집이 그립다
  • 강진신문
  • 승인 2022.08.16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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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권 _ 수필가

나는 요즘 백일 된 외손자의 어설픈 몸짓이 담긴 영상을 바라보는 팔불출 놀음에 빠져있다.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외할머니가 생각난다.

어릴 적 여름방학은 내가 학수고대하던 날이다. 어머니는 오일시장에서 옷 한 벌을 사서 입혀주고 붕어빵 한 봉지를 손에 쥐어 주면서 시장 어귀 팥죽집 앞까지 배웅해 주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려고 할 때 쯤 외가 동네에 이르렀다. 할머니는 먼발치서 나를 알아보고 걸어오셨다.

"어따 오매 내 강아지 걸어오느라 발이 얼매나 아팠을까."
외할머니는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를 닦아 주셨다.

아침을 먹고 외삼촌을 따라 갯가로 낚시를 간다. 개펄냄새 물씬 풍기는 바다에 도착하면 삼촌과 나는 노는 물이 달랐다. 삼촌은 수심이 깊고 물살이 세차게 흐르는 곳을 찾아 숭어와 돔 등 비교적 큰 고기를 잡았다. 삼촌은 동네 사람들이 인정하는 프로낚시꾼이다. 물결 속에 아른거리는 찌가 미세하게 움직여도 낚아 채 올렸다. 동네 꼬마들이 수심이 얕은 곳에서 낚시를 하고 있다. 거무튀튀한 얼굴에 작달막한 아이는 낚싯대를 넣자마자 끌어올렸다. 나는 신기한 광경을 한참 바라봤다.

방조제는 폭파한 돌을 갯벌에 차곡차곡 쌓아 올린 둑이다. 만조 때 물속에 잠겼던 밑 부분이 썰물 때 모습을 드러낸다. 개펄에서 먹이 활동을 하는 꽃게는 산란기에 돌 틈에 모인다. 철사 끝 부분에 미끼를 끼워 돌 틈에 넣고 흔든다. 시간이 얼마 쯤 지나면 슬그머니 먹이를 당긴다. 그 때 철사를 힘껏 잡아채야 한다. 작업용 장갑을 끼고 잡아당겨야 안전하다. 꽃게잡이에 집중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흐른다. 바닷물이 밀려오면 그보다 먼저 빠져 나와야 한다.

서산에 해가 머물면 낚싯대를 들고 의기양양 외갓집을 향한다. 바닷가에 서식하는 하루살이가 풍기는 비린내는 매우 역겹다. 하루를 백 년처럼 살고자 날아서 눈과 콧속을 무차별 파고든다. 손바닥을 좌우로 흔들며 갯바닥을 탈출한다. 낮은 산과 들판서 상큼한 냄새가 풍긴다. 동네 어귀에 이르면 저녁밥 짓는 연기가 솔밭으로 피어오른다.

방앗간 골목을 들어서자 여인의 통곡소리가 구슬프다. 예사롭지 않은 울음소리에 슬그머니 기웃거렸다. 중년 여자가 신방돌서 땅을 치며 대성통곡 한다. 그 울음소리는 바야흐로 냉전시대의 산물이다. 미국과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큰아들 전사 통지를 받은 어머니가 쑥대머리로 울부짖고 있다. 어미 소가 젖 물리던 송아지가 팔려가던 날, 아무것도 먹지 않고 밤낮 울다 끝내 목이 쉰다. 그때 들었던 창자를 뚫고 나온 그 울음소리다.

외할머니는 잡아온 물고기를 화덕에 구워 찬거리로 올려 주었다. 낚시를 가지 않은 날은 삼촌을 따라 뒷등 밭으로 갔다. 삼촌이 밭일하는 동안 곤충을 잡아 해찰을 부린다. 길쭉한 날개를 달고 노랗게 웃고 있는 개망초 한 다발을 꺾어 나비를 유혹해 보지만 관심이 없다. 방아깨비 한 마리가 손등에 뛰어올랐다. 풀잎 사이를 점프하던 메뚜기를 낚아챘다. 방아깨비 뒷다리를 잡고 흔들며 싸움을 시킨다. 해코지를 직감했는지 대응하지 않는다. 오늘은 흥행이 되지 않는 날이다. 외할머니가 계신 밭으로 달려 갔다. 치마를 걷어 올리고 밭도랑에서 찰옥수수를 따고 있었다. 하늘엔 먹구름을 잔뜩 끼어 있다. 천둥소리를 내며 소나기가 쏟아질 것 같아 서둘러 외갓집으로 돌아왔다.

하루 종일 장대비가 내린다. 추녀 끝에 주르륵주르륵 떨어지는 빗방울을 신기한 것처럼 바라본다. 오일장 팥죽집 앞에서 붕어빵 봉지를 주고 배웅해 주던 어머니가 아른거린다. 내 그릇에 팥죽을 덜어주던 어머니가 보고 싶다. 작은 설움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썰물처럼 지나간다. 희미하고 작았던 슬픔은 점점 크고 진한 색깔로 다가온다. 이윽고 하마 같은 슬픔이 아가리를 벌리고 밀려온다. 나의 평정심을 움켜쥐고 있던 상념은 슬픔을 재촉한다. 눈물을 흘리며 훌쩍거리다 외할머니에게 들키고 말았다.

외할머니는 광에서 튀밥과 유과를 가져왔다.
"내 강아지 집에 가고 싶어?"
"그래, 알았다 오늘 밤만 자면 보내 주마."

이른 아침을 먹고 삼촌을 따라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버스에 올라서자 삼촌이 두 손을 흔들었다. 덜컹거리는 버스가 기다란 논과 전봇대 옆을 재빨리 스쳐간다. 신작로에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던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자 새털구름 아래로 우리 마을이 보인다. 내 마음은 벌써 친구들과 냇가에서 멱을 감고 피라미를 잡고 있다.

연세가 구십이 되신 어머니는 기력이 쇠약하지만 외갓집 이야기를 하면 힘이 솟는다. 마침 딸이 영상통화로 전화가 걸려왔다. 어머니도 옹알거리며 팔딱거리는 증손자를 보시며 흡족해 하신다. 나는 부끄러운 줄 모르고 팔불출 놀음을 계속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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