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대 4대 미인과 미남은 누구인가?
중국 고대 4대 미인과 미남은 누구인가?
  • 강진신문
  • 승인 2022.07.26 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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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점권의 다시 보는 중국의 고전(13)

김점권 전 센터장은 도암출신으로 전남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포스코 및 포스코건설에서 25년간 근무하면서 포스코건설 북경사무소장을 거쳐 중국건설법인 초대 동사장을 지냈다. 이어 광주테크노피아 북경 센터장을 거쳐 교민 인터넷 뉴스 컬럼리스트로 활동했다. 중국에서 25년간 생활한 역사와 고전, 문학류를 좋아하는 김 전 센터장을 통해 중국고전에 대해 새롭게 접근해본다. 편집자주/

 

중국 고대 4대 미인 (古代 4大美人)은 누구인가? 서시(西施), 초선(貂蟬), 왕소군(王昭君), 양귀비 (楊貴妃)라고 하는데, 청나라 초기에 한성제 비 조비연(趙飛燕) 대신 가상의 인물 초선이 들어 갔다고 한다.

아름다운 여인을 표현하는 성어는 많지만, 이들 4명의 용모를 단적으로 표현한 성어는 '闭月羞花(비월차화), 沉鱼落雁(침어낙안)’ 즉, '꽃이 부끄러워하고 달이 숨게 하며, 물고기가 물속으로 들어가 숨고 기러기가 모래톱에 내려않는다' 라는 것이다. 여기서 '闭月'는 초선, '羞花'는 양귀비, '沉鱼'는 서시, '落雁’는 왕소군의 용모를 비유하여 표현 한 것이라고 한다.

4대 미인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자. 우선 '서시(西施)'는 '沉鱼(침어)' 미인이다. 유래는 서시가 강가에 앉아 빨래를 하고 있을 때, 물가에 비친 서시의 얼굴을 보고 반한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잊고 강바닥에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서시의 미모에 대한 고사는 '서시빈목(西施嚬目)' 즉, 속병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마를 찌푸린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남자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한 동네의 추녀가 똑같은 행동으로 비웃음을 샀다는 고사다.

춘추전국시대에 유명한 오나라와 월나라의 전쟁 시에 월나라 구천이 오나라 왕에게 패한 후, 미인계로 서시를 오나라 왕에게 바쳤다. 속내는 월나라 대부 범려가 민가에서 수소문 끝에 서시를 발굴하고, 치밀한 교육을 통해서 오나라 왕에게 헌상했으며, 서시는 오왕 부차의 사랑을 듬뿍받고 부차로 하여금 정사를 멀리하게 하는 미인계는 성공하여 결국 월나라는 오나라를 패망시킨다. 오나라가 망한 후, 서시는 어떻게 되었는가? 설이 분분하다. 자살했다는 설, 오나라 백성들이 죽였다는 설, 대부 범려가 서시를 데리고 초나라로 은거했다는 설 등이다.

다음은 '왕소군 (王昭君)'에 대한 전설이다. 정치인들이 자주 인용하는 유명한 성어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을 만든 주인공이다. 왕소군은 전한(前漢) 원제의 후궁이었으나 흉노의 선우(왕)에게 시집가서 일생을 보낸 미인이다. 왕소군은 평민 가정의 자녀로서 입궁하였으나, 자신을 홍보하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즉 당시 궁중에서는 화가가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려 보관하고 황제에게 보고하였는데, 일반 궁녀들은 출세를 위해 화공에게 뇌물을 선사했으나 왕소군은 노력하지 않았다.

후일 흉노에게 보낼 궁녀 선발 시, 황제는 궁녀들의 초상화 중 평범한 용모의 왕소군을 택했다. 그러나 왕소군의 실물을 본 황제는 너무나 미인임에 놀랐으며, 초상화를 왜곡한 화공을 처벌했다. 왕소군이 흉노의 선우를 따라 내몽고 지역으로 접어들 때, 마침 기러기 떼가 그녀의 머리 위를 날자, 소군은 비파를 꺼내어 연주하면서 자작한 노래를 부르자 그 노래가 너무 처연하고 아름다워 일행은 넋을 잃었으며, 하늘을 날던 기러기마저 그 노래에 넋을 잃어 날갯짓 하던 것을 잃어버려 땅으로 떨어졌다. 그래서 그녀에게 붙여진 이름이 '기러기가 떨어졌다'라는 의미의 '낙안(落雁)'이다.

다음은 소설 삼국지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여포의 애인 초선(貂蟬)이다.역사적으로 실제 존재 여부에 대해서 설이 분분하다. 초선은 소설 삼국지를 한 번이라도 읽어 본 사람이라며 누구라도 관심을 갖고 있는 충절과 미인의 대명사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정통 역사서인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에서 초선이라는 이름은 존재하지 않으며,  <삼국지 여포전(呂布傳)>에서만 '여포가 동탁의 시녀와 사통하던 중 동탁에게 들켰다'라고 기록되었다.

그러나 소설 삼국지에서는 왕윤의 양녀로서 여포와 동탁을 유혹하여 사이를 멀어지게 하고 결국 동탁을 제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소설 삼국지속의 초선은 대중적 미인의 대명사다. 초선의 실존 여부에 관계없이 소설 삼국지에서 초선의 미모를 표현하는 장면 중, 초선이 밤에 왕윤과 함께 후원에 나와 있던 중, 때마침 달이 구름에 가렸다. 이에 왕윤이 초선에게 말하길, '너무나 아름다운 너의 모습에 달도 부끄러워 모습을 가렸구나'라고 했으며, '달이 숨다'의 의미인 '閉月'은 이 대사에서 기원한 별명인 셈이다.

마지막으로 당나라 현종의 애인, 수화 (羞花) 양귀비 (楊貴妃) 얘기다. 미모로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대명사다. 양귀비는 어느 정도 미인인가? '꽃이 부끄러워한다'라는 의미의 '수화(羞花)'로 표현된다. 유래는, 어느 날 양귀비가 내원을 거닐다 '함수초(含羞草)' 라는 식물의 꽃에 손을 댔는데 갑자기 잎이 말리면서 움츠려 들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시녀가 꽃이 그녀의 미색에 부끄러워하며 움츠려 들었다는 소문을 내면서 별명이 되었다고 하는 과장된 고사다. 양귀비는 비운의 여성이다. 며느리로서 시아버지(현종)와 사랑을 나눴고, 현명한 황제 현종이 양귀비에 빠져버려 정치를 멀리하자 나라는 피폐해지고, 안록산의 난으로 사천으로 피난 가던 중 민중의 저항으로 오빠 양국충과 함께 처형되었다. 양귀비와 현종의 사랑은 역사를 뛰어넘는 스캔들이었다. 이후 백거이는 <장한가(長恨歌)>를 통해서 두 사람의 사랑 얘기를 장장 120행으로 표현하였다.

그럼 중국 고대 4대 미남(古代 4大美男)은 누구인가? 우선 역사적으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는 4대 미남은 반안 (潘安), 송옥(松玉), 위개(卫玠), 난능왕(兰陵王)이며, 또 다른 설은 송옥(宋玉) 대신에 죽림칠현 중의 한 명인 광릉산을 켠 거문고의 대가 혜강(稽康)을 말하기도 한다. 선정 기준은 공통적으로 뛰어난 용모와 타고난 자질이 우수해야 하며 문학, 음악, 무공의 수준이 높고, 정치적 식견 및 당대의 걸출한 인물이어야 한다고 한다.

자, 각 인물에 대해서 알아보자. 순위는 역사상 연도 순위다. 먼저, 전국시대 초나라 굴원(屈原)의 제자 송옥(宋玉)이다. 무협지에 종종 등장하는 미남의 대명사다. 송옥은 초나라 애국 시인 굴원의 영향을 받아서 그의 시사(詩詞)는 상당한 수준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송옥의 용모는 절대 잊을 수 없는 미남이었다. 송옥의 용모에 시기한 당대의 등도자(登徒子)가 초왕에게 "많은 사람이 송옥의 용모에 경도당하며, 송옥은 호색함으로 궁내의 후궁들을 접촉시켜서는 안된다.'라고 고자질하였다. 억울하게 모함을 당한 송옥은 초왕에게 이르기를, "우리 집 동편에 나를 사모하는 여인이 3년째 지켜보고 있지만 나는 마음을 준 적이 없으나, 등도자는 그의 부인이 추녀이지만 결혼하였다. 이는 등도자가 색을 밝히는 증거가 된다"라고 변명하자, 초왕이 그를 신뢰했다.

다음은 서진(西晋) 시대의 인물, 반안(潘安)이다. 그는 명실 상부한 고대 제일의 미남이다.​
반안(潘安)에 대해서는 '만약 나의 눈길로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반안은 이미 수천 번 죽고 말았을 것이다'라는 거리의 속어를 만들어낸 인물이다. 즉, 거리를 지날 때면 모든 여성의 눈길을 피할 수 없는 용모였던 셈이다. 반안의 명성은 대단해서 영향력이 대단했다. 특히 거리에 나갈 때는 모든 여성들이 발길을 멈추고 그를 쳐다봤으며, 여인들이 건네준 과일이 그의 마차에 가득 차는 일이 자주 발생되었다. 반안은 비록 많은 여인이 그를 사모하고 따랐지만, 그는 오로지 부인 양 씨만을 일생 동안 사랑하고 다른 여자를 구하지 않았다. 너무 멋진 남자다. 아울러 반안은 미남으로서뿐만 아니라 재질이 뛰어난 서진 시대의 빼어난 문학가였다.

세 번째는 동시대 서진에 명사, 위개(卫玠)다.그는 27세에 요절한 천고의 미남이다. 위개의 용모는 빼어났으며, 옥을 빚어 놓은 것처럼 수려하다고 해서 '옥인(玉人)'이라고 불렸으나, 그의 신체는 타고난 허약체질로서 그의 어머니는 기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말을 적게 하라고 하여서, 묵묵한 남자로서 독특한 기질을 보여줬다.  서기 312년 위개는 조정의 지시에 따라 건업(남경)으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소식을 듣고 몰려든 여인네들의 성화로 마차가 움직일 수 없었다. 신체가 허약한 위개는 이후 곧 병을 얻었고, 27세에 요절하여 숱한 여인들의 가슴을 태웠다. 미인박명이 아니라, 미남 박명인 셈이다.

마지막 남자, 난릉왕(兰陵王)이다. 그는 남북조(南北朝) 시기의 북제(北齊) 문양제의 아들이며, 난릉왕이다. 난릉왕은 용모가 빼어나서 전쟁에 참여할 때 전쟁의 비장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적군이 희롱하고 파안대소하여 할 수 없이 얼굴을 숨기기 위해서 가면을 쓰고 출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난릉왕은 빼어난 장수였으며, 항상 승리하였다고 한다. 난릉왕에 대한 고사는 많으며 중국 드라마에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

중국 고대의 4대 미녀와 미남, 당시 사진도 없고 애매한 초상화에 의해서 호사가들의 입맛에 맞게 선정되어 애매한 감이 없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단순한 용모가 아니라 그들의 행동과 업적이 당대의 백성들 마음속에 흔적이 남아있고, 역사적 문장속의 향기로 남아 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그들의 이름이 이어져 오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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