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벽과 문
[기고] 벽과 문
  • 이선옥 _ 신전면
  • 승인 2022.07.26 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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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옥 _ 신전면

우리 부부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따로 산다. 열 평 남짓한 둘의 공간을 벽으로 나누어 서로의 경계를 정했다. 이 공간은 내 영역이니 침범하지 말라고 둘 중 누군가 선언하거나 서로 합의한 사항은 아니다. 나눠진 공간을 각기 용도에 따라 사용하다 보니 각자의 영역으로 정해져 버렸다.

24시간 집이 삶의 무대가 돼버린 우리 부부에게는 각자의 공간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불과 1m 거리를 두고 있어도 한 공간에 있을 때와 벽을 사이에 두고 있을 때의 느낌은 사뭇 다르다.

한 공간 안에 있을 때는 상대방의 일거수일투족이 서로의 시선 안에서 의미를 갖게 되지만 벽 안에선 나라는 존재가 독립적으로 부각 된다. 상대방이 무엇을 하더라도 나는 벽의 보호를 받으며 관여하거나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벽은 나의 행동을 노출시키지 않는다. 한 상자 안에 담긴 과일들이 더 빨리 썩는 것처럼 한 공간 안에서 생활하다 보면 개인이 가진 특유의 냄새가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작은 일에도 시비가 붙기도 하고 소리 없이 쌓인 불만들이 불씨가 되어 공동체를 삼키는 불화로 번지기도 한다. 서로의 경계를 정해주는 벽 하나가 있으므로 자기를 보호하고 타인을 지켜주면서 공동체를 더욱 튼실하게 세워주는 것이다.

벽은 관계 안에서 서로를 지켜줄 뿐만 아니라 바깥세상으로부터 보호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세찬 바람과 폭우를 온몸으로 받아내어 재난의 피해를 막아주고 외부 침입자들의 발에 덫이 되기도 한다. 단독주택이 주류를 이루던 시절엔 좋은 집일수록 벽이 높고 벽 맨 꼭대기에 철조망이나 날카로운 유리 조각을 붙여서 불온한 세력들의 침입을 강력하게 막아주었다.

그렇다고 벽 하나로 인간이 추구하는 안전과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 人 자가 두 획이 서로를 기대어 사람이란 의미를 만들어내듯, 사람들은 벽으로 경계를 나누어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방어기제를 만듦과 동시에, 문이란 소통의 기제를 만들어 사람살이의 온전함을 추구해 왔다.

문은 나감과 들어옴의 역할을 통해 자신과 타인의 연결점을 제공한다. 벽 안에선 어떤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한 인간으로서 존재의 의미를 갖지만, 문이란 통로를 지나면 혼자만의 좁은 공간은 사라지고 우리라는 세상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된다.

문은 남편과의 소통을 통해 사회적이고 공적인 아내의 역할을 부여하면서 가족이란 공동체 안으로 서로를 불러들인다. 이렇듯이 문은 타인의 삶에 우리를 참여시켜 관계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타인을 우리의 삶에 초대하면서 더 넓은 세상으로 삶의 영역을 넓혀 준다. 

어린 시절 방 두 칸짜리에서 열두 식구가 몸을 부대끼며 살았던 때가 있었다. 한 칸은 부모님이 쓰는 방이었고 한 칸은 열 명의 형제자매들이 쓰는 방이었다. 아버지는 방과 방 사이의 벽을 허물어 미닫이문을 만들었다. 나누어졌던 방 두 칸이 하나의 공간이 되면서 온 가족이 얼굴을 마주 보며 식사를 하고 가족회의도 할 수 있는 소통의 공간이 되었다. 

한 부모 밑에서 낳고 자란 형제자매이지만 각기 다른 성격과 생각으로 인해 갈등을 빚는 일이 잦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문을 열어 끊임없이 소통하며 상대방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법과 존중과 배려를 배웠다. 오로지 혼자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는 개인의 방을 갖고 싶었던 게 모든 형제자매의 소원이었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을 포기하는 대신 가족공동체의 결속이 돈독해질 수 있었다.

우리는 문을 통해 세상으로 나가 우리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다. 또한 문을 통해 들어와 세상에서 부대끼고 지친 몸과 마음을 자신만의 공간에서 재충전한다.

문은 우리의 눅눅해진 삶의 공간을 환기시킨다. 열어젖힌 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공기는 이산화탄소로 눌린 우리의 호흡을 정상으로 되돌려 준다. 햇볕과 바람을 초청해서 구석구석 박혀 있던 어둡고 습한 기운을 말끔히 몰아낸다. 벽과 문은 삶의 공간 안에서 물리적인 환경으로서 세상을 지탱해주는 커다란 힘이 된다.

벽과 문이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우리의 삶에 깊이 관여하고 있음에도 존재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했는데 금이 간 벽 사이에서 떨어지는 시멘트 가루가 나에게 말을 건넸다. 지금까지 당신 곁을 지키느라 참 힘들었다고. 오래되어 금이 간 시멘트벽에 방수 벽지를 붙인다. 마치 상처 난 남편의 등에 약을 바르듯이. 열어젖힌 창문으로 오후의 햇살이 방안 깊숙이 들어와 새로 단장한 벽에 빛을 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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