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슬픈 역사를 머금은 비둘기 바위
일제 강점기 슬픈 역사를 머금은 비둘기 바위
  • 강진신문
  • 승인 2022.07.18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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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옛 이야기 - 남성리 영랑길 6]
울지마, 비둘기 바위야(Ⅱ)
구암정 아래에 있는 비둘기 바위

 

강진군은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강진 이야기를 발굴하고 계승하기 위해 지난 2019년부터 매년 '우리 동네 옛이야기' 책을 발간하고 있다. 책 편찬에는 강진 출신 김옥애, 강현옥, 장미연 동화작가가 글로, 김충호 화백이 그림으로 참여하고 향토사학자 양광식 강진문사고전연구소장의 감수를 받았다.
올해 세 번째 펴내는 강진 이야기 동화책에는 남성리 영랑길의 역사, 문화 이야기 6편을 오일파스텔 삽화와 함께 책에 담았다.
'우리 동네 옛이야기' 남성리 영랑길 편에 가까운 옛날 실존했던 인물들과 유적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내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강진의 역사를 살펴보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내년 봄이라……." 현감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어.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현감은 서찰(편지)을 쓰고 심부름하는 아이를 불렀지.

"너 이 서찰을 동문안 김 진사 어른께 전하고 기다렸다가 답신을 받아오너라."

아이는 서찰을 받아들고 넙죽 절을 하더니 바람처럼 쌩 하고 달려나갔어. 그리고 한 시간쯤 지나자 답신(답장)을 들고 또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달려왔지. 김 진사가 보낸 답신엔 이렇게 적혀 있었어.

모든 일은 순리대로 따르는 게 좋습니다. 가만히 있는 바위를 사람 손으로 깨는 게 순리가 아니라면 물이라는 자연물로 갈라지게 하는 게 순리겠지요. 그보다 더 순리는 그 바위를 깨더라도 강진 백성들의 기세가 깨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는 것이겠지요.

"흠……" 답신을 다 읽은 현감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지.
공사는 김 진사의 조언대로 그 해 겨울을 넘겨 다음 해 봄에 일을 끝냈어. 물의 힘을 빌어 조금씩 틈을 벌려가며 깨뜨린 거지. 그리고 정으로 나머지 부분을 더 떼어냈어. 일부러 깨뜨린 바위의 모습은 참 가련해 보였지. 저게 뾰족한 바위였나 싶을정도로 그 전의 모습을 알 수 없게 반반해져 버렸어. 신유 현감은 그 일을 끝으로 강진을 떠나갔지. 처음의 목적을 다 이루고서 말이야.

그리고 다시 오랜 세월이 흘렀어. 때는 1915년 일제 강점기야. 그동안 비둘기 바위는 수풀에 쌓이고 흘러내린 흙에 덮여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어. 비둘기 바위는 강진 읍내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어 있었지.

"자! 나를 따르라!" 짙은 눈썹에 다부진 입매를 가진 소년이 목검을 높이 쳐들고 소리쳤어. 비둘기 바위 위에 떡하니 올라선 모양이 마치 이순신 장군 같았지. 아니나 다를까? 소년의 입에서 이순신 장군 이름이 흘러 나왔지.

"나는 이순신이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제법 이순신 장군의 흉내를 내는 이 소년이 바로 우리 문단계에 한 획을 그은 영랑 김윤식 선생님이야.

 

"아, 정말! 채준이 형, 좋은 역할은 왜 맨날 형 차지야?" 잘 손질된 단정한 머리에 말끔하게 잘생긴 또래인 듯한 소년이 소리쳤지. 채준은 영랑 선생님의 어릴 적 이름이야. 영랑은 아호인데 문학 활동을 하면서는 영랑이라는 아호를 쭉 써서 사람들에겐 '김영랑'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거지. '채준'이라는 이름은 어릴 적에만 쓰고 곧 '현식'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했어.

영랑 선생님을 채준이 형이라 부른 소년은 바로 영랑 시인의 사촌인 김현구 시인이야. 두 소년은 한 살 차이로 또래라서 어린 시절 친구처럼 지내곤 했지. 그래서 시간이 나면 탑동 마을에서 오르면 10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비둘기 바위에 올라 장군놀이를 하곤 했지.

덩 덩 덕 쿵 덕, 덩 덩 덕 쿵 덕
장군놀이에 지치면 소슬바람 한 자락을 맞으며 바위에 아무렇게나 다리를 펴고 앉아 허벅지를 북 삼아 세마치장단을 치며 진도 아리랑을 뽑아대기도 했지.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에에엣
아리랑 응응으응 아라리가 났네

영랑의 장단에 조무래기 동생들이 후렴구를 먼저 뽑으면 영랑이 메기는 소리를 집어넣곤 했어. 진도 아리랑은 세마치장단에 얹은 노래라 빠르고 흥겨운 민요야. 그럼에도 힘겨운 고개를 넘는 시기라 그런지 당시의 진도 아리랑은 한이 깊이 배어있고 시대상을 담는 노랫말은 눈물을 자아냈지.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구부(굽이의 노래 발음)야 구부구부(굽이굽이)가 눈물이로구나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에에엣
아리랑 응응으응 아라리가 났네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이내 가슴 속~엔 수심도 많다아아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에에엣
아리랑 응응으응 아라리가 났네
사람이 살면 몇 백년~ 사나아아
개똥 같은 세상이나마 둥글둥글 사~세~~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에에엣
아리랑 응응으응 아라리가 났네
쓸만한 밭뙈기 신작로 되고요오오
쓸만한 사~람은 가~막소(감옥을 이르는 강원도와 전라도 사투리) 간다아아

아이들은 가막소가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주변에 가막소를 갔다온 사람들은 종종 보았지. 그래서 '가막소 간다'라고 메기는 부분에선 자기도 모르게 코끝이 시큰해지곤 했어. 아마도 식민지라는 길고 긴 터널 같은 시간들을 보내야 하는 자신들의 미래가 느껴져서 더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정작 진도 아리랑을 구슬프게 부르고 있는 영랑이 몇년 뒤에 가막소에 가게 되리라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거야. 아마 영랑 자신은 예감하였을까?

그로부터 4년 뒤인 1919년, 강진에서도 독립 만세 운동이 펼쳐졌어. 17세의 어린 영랑 선생님도 만세 운동에 동참했지.

혹시나 모를 일에 대비해서 만세 운동은 1차와 2차로 나눠 비밀리에 진행되었어. 1차 시도가 혹시 중간에 발각되어 허사로 돌아가더라도 2차에 반드시 성공시키기 위해서였지.

그만큼 강진 사람들의 만세 운동에 대한 의지와 염원은 간절했던 거야. 아쉽게도 1차 시도는 발각되어 영랑 선생님을 비롯한 12명의 동지들은 옥고를 치러야만 했어. 하지만 그럴 경우까지 대비해서 준비한 2차 시도는 성공할 수 있었어.

1919년 4월 4일. 강진 장날이었지. 이른 아침 강진 평야는 자욱한 안개에 뒤덮여 있었어. 마치 폭풍전야를 예고라도 하듯 너무도 고요했어. 그러나 그 안개 속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던 이들은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었지.

헉! 헉! 아직 동이 트기 전인 어스름한 시각 거친 숨소리가 산 공기를 갈랐지. 하지만 가만 들어보면 그건 정말 숨이 차서 내는 소리와는 사뭇 달랐어. 그건 자신의 숨소리마저 참으려는 묘한 소리였지. 커다란 봇짐을 둘둘 말아 등에 지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산길을 오르는 남자가 있었지. 아직 새벽공기가 찬데 남자의 등은 온통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어.

헉! 헉! 작은 숨소리마저 내지 않으려고 입을 틀어막았지만 그럴수록 더 거친 숨소리가 새어나왔지. 그건 힘들어서라기보다는 지나친 조심성 때문이었지. 남자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바쁘게 산을 오르고 있었어. 그리고 비둘기 바위 근처에 자리를 잡고 넝쿨 사이로 몸을 숨겼지.

새벽부터 비둘기 바위에 오른 이 남자의 이름은 김후식. 바로 강진 4. 4 독립 만세 운동의 시작점을 알린 사람이지. 3.1 만세 의거 이후 만세 운동은 들불처럼 퍼져 나갔는데 그 중에서도 강진 4. 4 만세 운동은 전라남도 최초의 만세 운동이었지. 3.1 만세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얼마나 무참한 폭력에 죽거나 다친 줄 알면서도 두려움을 떨치고 의거를 일으키려고 한 거지.

오전 11시 강진 시장 어물전은 어느 때와 다름없는 풍경이었어. 하지만 상인들 사이에는 비밀스러운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지.

"오늘 가지고 나온 생선은 물건이 좋습니까?" 시장 상인으로 가장한 박학조가 상인인 김성수에게 물었지.

어물전 상인들이 특히 만세 운동에 비밀리에 동참하였는데 그들은 태극기, 독립 선언서 등을 어물전 상자 속에 대량으로 숨기고 있었거든. 신호가 오면 시장 상인들과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에게 나눠줄 계획이었던 거지.

"오늘 물건은 최고지요. 고등어가 살아서 눈을 희번덕거립니다요." 김성수가 희죽희죽 웃으며 대답했어. 태극기며, 독립 선언서, 독립가 등의 운반이 순조롭게 잘 운반되었다는 비밀스러운 대답이었지.

"오늘 대목 보시겠군요." 박학조도 빙그레 웃으며 받아쳤지.
댕! 댕! 댕! 얼마 후 강진읍교회에서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어. 그리고 드디어 비둘기 바위 위에 대형 태극기가 걸렸지. 오랜 옛날 와우형국의 급소라 하여 한 치쯤 깎아버린 그 비둘기 바위에 말이야. 강진 사람들의 의로운 기세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던 거야. 그걸 신호로 우렁찬 함성이 어물전에서부터 파도가 되어 밀려 나왔어.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강진 상인들의 만세 소리에 어린 학생들의 소리도 이어졌지.
미리 계획되어 있던 강진보통학교 학생들의 소리까지 더해진거야. 비둘기 바위 위에 솟은 대형 태극기는 더욱 가열차게 흔들리고 있었어. 깎아버린 비둘기 바위 위에 다시 새살이 돋은것만 같았지.

그러나 비폭력적인 이날의 만세 운동을 일본 헌병은 잔인하게 진압했어. 진압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주동자들은 장흥 검사국으로 끌려가 모진 태형을 받기도 했지. 그러나 강진 사람들의 의로운 이 항거는 두고 두고 후손들 입에 오르 내리게 되었단다.

그리고 그 의로운 항거는 많은 시간이 흐른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니? 몇 년 전 촛불 시위때에도 강진 사람들은 가만히 있질 않았지. 강진 사람들이 누구니? 황소의 기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잖아. 평소엔 우직하게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하지만 정의롭지 못한 일들이 생기면 황소처럼 뿔을 세우고 일어난단다. 문득 그 옛날 하얀 명주 두루마기 자락 휘날리며 신유 현감에게 조언을 남긴 어느 분의 말이 생각나네.

"바위를 깨는 것 보다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순리겠지요."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나라를 다스리는 분들은 바위를 깨고 있을까? 백성들의 마음을 얻으려 하고 있을까?
아 참! 그런데 비둘기 바위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질 않았네.

영랑생가 뒤편 모란공원 쪽으로 오르면 구암정이라는 전망대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이 구암정도 비둘기 바위의 한자어인 '구암'에서 비롯된 이름이지. 그런데 정작 구암정은 많이 아는데 강진 사람들도 비둘기 바위는 잘 모르는 거야. 왜냐하면 구암정에 가려지고 큰 소나무들 사이에 가려져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이지. 그래서 내가 찾은 날도 옛날 추억을 되새기며 쓸쓸하게 울고 있더라구. 그러니 나중에 구암정을 지날 때면 비둘기 바위에게도 꼭 말을 걸어주렴.
"울지마, 비둘기 바위야. 우린 널 항상 기억하고 있단다."라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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