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빗소리
[기고] 빗소리
  • 이선옥 _ 신전면
  • 승인 2022.06.28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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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옥 _ 신전면

눈꺼풀에 걸려있던 졸음이 화선지에 떨어진 수묵처럼 서서히 몸속으로 스며드는 순간이다.

갑자기 거대한 짐승이 포효하듯 소낙비 쏟아지는 소리가 모처럼 불면증에서 풀려난 의식을 사정없이 흔들어 깨운다. 일기예보에서 밤부터 남부지방에 꽤 많은 양의 비가 올 거라고 했지만 빗소리에 잠을 설칠 만큼 폭우가 쏟아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빗소리는 깊이 잠든 고요를 깨뜨리며 검은 양철지붕을 뚫고 내 가슴까지 파고들어 엉엉 울기 시작한다.

낮에 신문에서 보았던 짧은 기사가 삽화와 함께 TV에서 방영된 다큐처럼 내 눈 앞에 펼쳐진다. 기사 제목은 '도와주세요'였다.

한강대교에 올라간 혜진 씨는 살고 싶었다. 코로나19 감염으로 직장을 잃은 지 수개월째다. 방을 빼라는 집주인의 말을 들은 날 그녀의 수중에는 단돈 5만 원이 전부였다. 극단적 선택을 다섯 차례나 시도했다.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가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우울증이 심해 정신과 치료를 받던 중 자살을 시도한 것이다. 다리 난간에 몸을 기댄 그녀의 아슬아슬한 모습이 빗소리와 섞이면서 몸 곳곳에 생채기를 내는 것만 같다. 늦게 먹은 저녁밥이 역류로 가슴이 답답하다.

어떻게든 잠을 청해보려고 몸부림을 칠수록 의식은 더 또렷해지고 빗소리는 수십 명의 아이들이 한꺼번에 엉엉거리며 우는 소리처럼 요란하게 어둠을 흔든다.

그래, 어쩌면 수십만 명의 이 시대 청년들의 울음소리인지도 모른다. 온갖 스펙을 쌓느라 물질과 시간을 몽땅 투자해도 변변한 직장을 갖지 못한 청년들, 밤낮없이 일하고 허리띠를 졸라매도 마음 편히 쉴 공간 하나 확보하지 못하는 청년들, 달콤한 연애도 안온한 가정도 돈으로만 치환할 수 있는 시대의 파도 앞에서 맥을 못춰 쓰러지는 청년들, 토끼처럼 붉어진 눈알을 밤새 굴리면서 가상화폐로 일확천금을 노리고, 영혼까지 끌어모아 부동산에 투자해 돈 버는 것이 꿈이 돼버린 청년들의 군상에서 깊어가는 어둠의 적막함을 본다.

누구나 살다 보면 방황할 때가 있다. 청년의 때가 더욱 그러하지 아니한가, 꿈과 현실의 간극을 좁히기 힘들어 깊은 갈등으로 잠 못 이루는 날이 있다. 청년 때의 불온함을 살아내지 못하고 타협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도 있다.

어쩌다 사랑이란 황홀함에 포박되어 젊음의 에너지를 최다 털리고 허무한 이별을 경험한다. 내 젊은 날의 거리에도 폭풍우가 잦았다.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인생에 대한 번민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빚어낸 갈등으로 깊은 우울감 속에서 허우적거렸던 날이 참 많았다.

지나놓고 보니 인생길을 걷다가 발에 부딪히는 돌부리였던 것을, 함께 울어주고 상처를 싸매줄 단 한 사람이 없어 상처의 고통보다 외로움에 질식해서 쉽게 쓰러졌는지 모른다. 깊은 어둠 속에 절망의 짐을 지고 벼랑 끝에 서서 누군가의 따스한 품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많을 것이다. 내 집 비설거지 하느라 이웃집 담장 무너지는 소리를 지나치는 실수는 범하지 않았을까, 손안에 쥐고 다니는 작은 기계에 눈과 귀를 도둑질당해 이웃들의 아픔을 듣지도 보지도 못했는지 모르겠다. 

내 집 담을 딸 담과 담이 이어져 마을을 이룬다. 마을과 마을이 길을 고리 삼아 이어지면서 지구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가 한 지붕 아래 가족이 아니던가. 공간적 거리는 멀어도 마음의 거리는 좁히기 위해 타자를 향한 관심의 문을 열어두어야 할 때다.

서로 눈을 마주치고 어깨를 맞대고 느끼는 온기로, 생존 경쟁으로 사막화된 세상에 어떤 가뭄이나 비바람에도 끄떡없이 푸르게 자랄 수 있는 사랑의 나무를 심어야 할 때다. 과학과 기술이 사람의 가치를 대신하는 물질문명의 무례함을 엄히 꾸짖을 정신문명을 일구기 위해 우리의 영혼 속에 숨겨진 빛나는 지혜를 모아야 하지 않을까. 청년들의 울음소리가 꿈과 희망의 노랫소리로 변하여 온 세상이 춤추게 할 날을 기대하면서.

양철지붕에서 밤새 소리치던 비는 어둠이 걷히면서 잦아들었다. 원 없이 울고 나니 속이 후련해서 마음을 추스를 힘이라도 생겼을까. 밝아오는 빛의 숨결이 들썩이는 어깨의 설움을 다독여 주었을까.

잠을 설친 탓에 온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묵직하다. 기상을 재촉하는 알람 소리가 뭉그적거리는 무거운 몸뚱이를 밖으로 몰아세운다. 기도의 삽질을 시작할 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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