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감자탕 이야기
[기고]] 감자탕 이야기
  • 이선옥 _ 신전면
  • 승인 2022.06.06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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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옥 _ 신전면

싸구려죠. 돼지고기 부위 중에서 제일 천덕꾸러기 등뼈와 배추밭에 버려진 시래기 주워다 푹 삶아 놓은 것을 감자탕이란 그럴싸한 이름을 붙여 신분을 상승시켜 놓았지요. 특별한 양념이나 다른 재료를 요구하지 않고도 제 몸에서 나오는 맛으로 모든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감자탕의 매력이야말로 빈부귀천 구별 없이 찾게 되는 이물 없는 존재이지요.

음식이란 본래 사람의 목숨을 쥐락펴락하는 것이라서 건강이 행복의 우선순위로 자리매김한 요즘에는 몸에 좋고 맛도 좋은 음식들이 계급장 쟁탈전을 벌이고 있지요.

좋은 재료와 다양한 요리법을 통해 높은 자리로 신분을 상승한 음식들이 소비자들의 두툼한 주머니를 유혹하느라 바쁜 시절인데도 감자탕은 무슨 배짱을 가졌을까요? 오랜 세월을 후미진 도시의 뒷골목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초라한 자기 존재를 과시하고 있으니까요.

출신 성분을 탓해야겠지요. 별 볼 일 없는 음식들이 진화를 거듭하면서 호텔이나 고급 음식점에서 지체 높은 분들 앞에 잘난 맛을 뽐내고 있는데도 감히 그들의 자리를 넘볼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차라리 갈 곳 없는 나그네들이 몸을 눕히는 역 광장 뒷골목이나 재래시장 골목 어귀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서민들의 속풀이 감이 되는 것이 훨씬 편하고 주제 맞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어쩌면 참 다행한 일인지도 모르죠. 주머니 가볍고 배고픈 사람들에겐 감자탕만 한 영양소 넉넉한 음식도 없으니까요. 쫄깃한 살코기에 고소한 지방과 배추의 풋풋한 맛이 적당히 어우러져 탕 한 그릇이면 하루를 버티고도 남을 충분한 영양을 제공한다는 게 얼마나 귀한 일인가요.

내가 자란 소도시 삼류극장 건너편에 낡은 감자탕집이 있었지요. 배춧잎 같은 손등을 가진 70대 할머니가 이른 아침이면 가마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감자탕을 퍼 나르고 있었어요. 엉덩이만 겨우 걸쳐지는 긴 나무 의자에는 먹이를 찾아 나온 가난한 사람들이 새벽 찬 바람에 시린 속을 달래느라 고개를 주억거리며 연신 입김을 뱉어내고 있었지요.

단돈 이천 원에 시리고 헛헛한 속을 풀어주기에는 할머니의 감자탕만 한 음식도 없었으니까요.

어둠에 숨어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 새벽시장을 보러 나온 사람, 시간에 쫓기며 삶을 달려야 하는 택시 기사들, 하루 벌어 하루치의 목숨을 지탱하는 사람들에게 감자탕은 싸구려의 편안함과 따스함으로 응원의 손을 힘차게 흔들어 주었지요.

천대받고, 버려져서 발에 밟히고, 늙고 연약해져서 볼품이 없는 몸들이 서로 힘을 합쳐서 춥고 힘겨운 세상을 보듬어주는 감자탕집 골목엔 생명이 살아나는 소리로 늘 왁자했지요.

잘나고 못나고에 힘을 쏟을 정신도 없이 그저 살아내는 것도 버거워하는 사람들과 함께 서로를 다독이며 존재할 수 있다면 출신 성분 따위는 열등감이나 부추기는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감자탕은 떳떳하게 큰소리칠 만도 해요.

어떤 때에는 사람살이가 먹기 위해 살고 있는지 살기 위해 먹는지 헷갈릴 만큼 팍팍할 때가 있지요.

그래도 감자탕같이 이물 없는 이웃들이 우리 곁에 있으니 비바람에 흔들리고 찢긴 가슴으로도 인생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겠지요. 아무리 우리가 목숨을 다해 높은 곳으로 날아올라도 지친 날개 쉴 곳 하나 없다면 차라리 땅바닥에 다리를 펴고 앉아서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을 보는 것이 더 소박하고 확실한 행복이 아닐지요.

그래서, 신은 우리의 몸에 날개를 장착해 주지 않았을 거예요. 끝도 없는 하늘을 날며 먹이를 찾아야 하는 새의 날개보다는 두 발로 땅을 딛고도 하늘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사랑을 우리 마음에 장착해 둔 것이 신이 인간에게 베푼 최고의 배려가 아니었을는지요.

요즘은 먹거리가 차고 넘치는 시대라 감자탕도 가끔은 변신을 시도해 보지요.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계속 먹으면 물리는 법. 혹시라도 여태껏 닦아 놓은 자리를 빼앗길 게 겁이 난 것일까요?

그래봤자 돼지 등뼈에 우거지나 묵은지 같은 한물간 것으로 짝만 교체했으니 그 맛을 크게 벗어날 일이 있겠어요? 그래도 감자탕이 앉을 곳만 있으면 골목이든 시내 중심가든 세력을 확장하네요.

"시래기 감자탕 한 그릇이요. 묵은지 감자탕으로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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