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읍 지도를 바꾼 신유 현감
강진읍 지도를 바꾼 신유 현감
  • 강진신문
  • 승인 2022.05.30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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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옛 이야기 - 남성리 영랑길 5]
울지마, 비둘기 바위야(Ⅰ)

강진군은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강진 이야기를 발굴하고 계승하기 위해 지난 2019년부터 매년 '우리 동네 옛이야기' 책을 발간하고 있다. 책 편찬에는 강진 출신 김옥애, 강현옥, 장미연 동화작가가 글로, 김충호 화백이 그림으로 참여하고 향토사학자 양광식 강진문사고전연구소장의 감수를 받았다.
올해 세 번째 펴내는 강진 이야기 동화책에는 남성리 영랑길의 역사, 문화 이야기 6편을 오일파스텔 삽화와 함께 책에 담았다.
'우리 동네 옛이야기' 남성리 영랑길 편에 가까운 옛날 실존했던 인물들과 유적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내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강진의 역사를 살펴보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구암정 아래에 있는 비둘기 바위

 

 강진의 지형(땅 모양)을 가리켜 '와우형국'이라고 부른다는 말은 많이들 들어봤지? 드러누운 소의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래. 하지만 그 소와 관련된 형상이 예전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다는 건 알고 있니? 그리고 어디가 어떻게, 누구의 뜻으로 바뀌었는지는 알고 있니? 잘 모른다고? 잘 몰라서 부끄럽다고?

에이, 괜찮아. 그 이야기를 하려는 나도 사실은 처음엔 잘 몰랐으니까. 그리고 크게 관심을 갖지도 않았어. 여러분처럼 나도 해야 할 숙제가 많아 우리 지역 이야기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거든.

그런데 말야. 우연한 계기로 지역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 하나 찾다보니 관심이 생기고, 관심이 생기다 보니 찾아보고 알게 되고, 알게 되니 더 사랑하게 되더라구. 그러니 여러분도 하던 숙제를 잠시 미뤄두고 우리가 사는 곳에 대해서도 잠시 관심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오늘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지만 세월 속에 잊혀져 외롭게 울고 있는 바위에 대해 알려 주려고 해. 이제부터 그 바위를 찾아가려고 하니 마음의 눈과 귀를 열고 따라오렴.

'흠, 뭘까? 나름 중요한 지세는 다 바꾸거나 기운을 눌러 놓았는데 뭔가 개운치가 않아.'

강진 현감 신유는 이른 아침부터 동헌 앞마당을 정신없이 거닐고 있었어. 자신도 그 까닭을 정확히 알 수 없었지. 때는 효종 3년(1652년) 4월 어느 날이었어. 온 세상에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화창한 봄날이었지. 있던 고민도 사라질 봄날에 현감 신유는 뭔가 찜찜한 기분을 오랫동안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던 거야. 그때였어.

"사또! 동문에 사시는 김 진사가 찾아왔습니다."
등 뒤에서 예방이 알리는 소리가 들렸어. 돌아보니 하얀 명주 두루마기를 깨끗하게 차려입은 백발의 노인이 서 있었지.

"아, 김 진사님 마침 잘 오셨소이다. 안 그래도 찾아뵐까 하던 중이었는데 이리 먼저 찾아주시다니 고맙습니다."
현감은 김 진사를 반갑게 맞았지.

"시골에 묻혀 살아 세상 물정도 모르는 뒷방 늙은이를 어찌 찾으셨는지요? 그새 또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김 진사는 신유 현감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듯 빙그레 웃으며 답했어.

"허허! 뒷방 늙은이라니요? 이 남도 끝에 앉아서도 천기를 읽고 지세를 저 보다 더 잘 읽고 계시는 분께서 겸손도 지나치십니다. 자자!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부족한 제게 오늘도 한 수 가르쳐 주시지요."

신유 현감은 김 진사를 안으로 모시고 들어갔지. 방 안엔 바둑판과 간단한 다과상이 벌써 준비되어 있었어.

"그럼 오랜만에 수담(손으로 두는 담소라 하여 바둑을 이르는 말)이나 나누고 갈까요?"
김 진사는 눈부시도록 하얀 명주 도포 자락을 펼치고 앉았어. 맞은편으로 신유 현감도 앉았지. 신유 현감이 흑돌을 들고 먼저 첫 수를 놓았어. 그 뒤를 김 진사가 백돌로 막으며 말문을 열었어.

"원하던 방향대로 대공사를 다 치르고 난 영웅의 얼굴이 어째 어둡습니다."
"영웅이라니요? 허허……. 그저 어찌하면 백성들에게 이로운 일이 될까 고민 끝에 한 일들인 걸요."

현감은 자신의 의도를 훤히 알고 있는 김 진사가 놀랍기도하고 부담스럽기도 했지.
김 진사가 말한 대공사는 신유 현감이 강진에 부임하던 때부터 줄기차게 진행한 일들을 말하는 거야. 강진의 지형이 드러누운 소를 닮아 이속들이 현감의 말을 안 듣고 백성들도 드세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부임 첫 해부터 소의 코에 해당하는 동헌 앞에 연못을 팠어. 그리고 서문 성 한 부분을 헐어 물을 끌어와 연못에 물을 채웠지. 그러자 거친 황소의 코에 코뚜레를 뚫은 형국이 됐지. 그 뿐인가? 허물어져 가는 동쪽 성을 재정비한다면서 동문 샘을 성 밖으로 내놔버렸지. 그래서 또 소의 한쪽 눈이 소 머리 밖으로 빠져나간 모양새가 되어버렸어. 결국 소는 한쪽 눈을 잃게 된 거지. 그 일 때문이었을까? 우연의 일치겠지만 그 후로 관아의 아랫사람들도 백성들도 현감의 말을 잘 듣게 되었대.

"어차피 이제 제 속을 훤히 알고 계시니 하나만 더 여쭙겠습니다. 거친 소에게 코뚜레도 뚫고 멍에도 씌워 묵묵히 일을 하게 만들었는데 뭔가 부족함이 느껴진 듯하니 제가 뭘 놓치고 있는 걸까요?"

"흠……." 김 진사는 허연 수염을 한번 쓸어내리며 대답 대신 현감의 눈을 빤히 쳐다봤지.
"그건 사또께서 더 잘 알고 계실 듯 합니다만……."
"그 무슨 말씀이신지요?"

 

신유 현감은 김 진사가 무언가 알면서도 쉽사리 답해주려 하지 않자 더욱 조바심이 났어.
"사또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도 지세를 좀 볼 줄 압니다. 허나 사실 지세라는 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 문제인 것이지요."
"그래서 그 사람들의 드센 기운을 바꾸려고 제가 그리도 지세를 바꾸려고 한 게 아닙니까?"
"사또께서는 아직 제 말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셨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백성들의 기운은 지형을 바꿔서 될 문제가 아니지요. 외람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백성들은 아이들과 같지요. 배불리 먹여주고 따뜻하게 재워주고 사랑으로 감싸주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굳이 코뚜레를 뚫을 필요는 없지요. 강진 사람들은 오랫동안 바다에서 오는 왜적과 싸워 살아남은 강인한 사람들입니다. 산과 바다와 넓은 들이 강진 사람들을 만들었지요. 그러니 어느 한 곳을 깨뜨린다고 강진 사람들의 기세가 꺾이겠습니까?"

김 진사는 잠시 말을 끊고 현감을 바라보았어. 김 진사는 조선 사회에서는 자칫 반역으로도 몰릴 수 있는 위험한 말을 하고 있었지. 그러나 신유 현감은 김 진사의 사람됨을 아는지라 조용히 듣고만 있었지.

"저는 강진 사람들의 그 기운을 오히려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황소 같은 그 강인한 기운이 있었기에 임진년과 정유년 왜적(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말함)을 다 막아내고 오랑캐들이 휩쓸고 갔어도(병자호란) 이렇게 다시 논밭을 일구고 있지 않습니까? 저 보리밭 좀 보십시오."
김진사는 동헌 누마루로 나서며 말했지. 저 멀리 남당포 앞까지 펼쳐진 평야엔 보리들이 봄바람에 진초록빛 파도를 일으키고 있었지.

"강진 사람들은 저 보리 같은 이들입니다. 밟아도 밟아도 다시 굳세게 일어나서 저렇게 튼실하게 알곡을 매달지요. 참으로 감격스럽지 않습니까?"
신유 현감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 그러나 김 진사가 알고도 답해주지 않는 것만은 꼭 알고 싶었어.

"어르신 뜻은 잘 알겠습니다. 허나 이왕 시작한 일이니 끝은 보게 해주시지요. 제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어디입니까?"
"흠……. 사또께선 또 사또의 책임이 있으시겠지요. 정 그러시다면 알려드리리다."

김 진사는 깊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어.
"모든 짐승에겐 급소가 있지요."
"옳거니!"
"이곳 황소에게도 급소가 있지요."
"아하! 제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군요. 거기가 어디입니까?"

"동헌 뒤쪽으로 보은산을 오르면 비둘기가 내려앉은 형상을 한 바위가 여럿 있을 겁니다. 특히 비둘기가 머리를 쳐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뾰족한 부분이 소의 양쪽 뿔 사이 정중앙 급소에 해당하는 부분이지요."
"잘 알겠습니다. 어려운 걸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쎄요. 감사를 받을 만한 일이 아닌 것 같소이다. 그럼 뒤는 사또께서 잘 판단하시길 바랍니다."

김 진사는 알 듯 모를 듯한 말만 남기고 돌아갔어.
"그건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하다니? 시도나 해보고서 그런 소리를 한단 말인가?"
신유는 버럭 화를 냈어. 동헌 마루 아래로는 건장해 보이는 장정 몇이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지.

"도대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뭔가?"
"그게 그러니까……."
"그깟 바위 하나 깨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그리 호들갑들인 게야?"
"그게 참 이상합니다요. 소인은 십수 년을 돌만 만지고 살아왔습지요. 그래서 작은 돌멩이에서 큰 바위까지 참 많이도 만져보았지요. 그런데 이 바위처럼 난감한 바위는 처음입니다."

석공들 중 희끗희끗한 머리가 드문드문 있어 대장인 듯한 이가 대답했어.
"난감이라니? 도대체 뭐가 난감이란 말인가?"
"정이 먹혀들질 않습니다. 정이 먹혀야 시간이 걸리더라도 틈을 낼 수 있을 텐데 도무지 정이 먹히질 않습니다. 자네들도 해보지 않았는가?"

석공 대장이 옆 사람들을 둘러보며 물었어요.
"네, 맞습니다. 소인은 오히려 튀는 정에 맞아 하마터면 발등을 크게 다칠 뻔 했습니다."
젊은 석공은 울먹이며 조심스레 다리를 내보였지요. 발등을 칭칭 감은 삼베 위로 붉은 피가 배어 나온 걸 보니 상당히 많이 다친 듯해 보였지.

"흠……." 현감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어.
"혹시 이 일대에서 정이 먹히지 않는 바위를 본 적이 있는가?"
현감이 다시 물었지요. 석공 대장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대답했어요.
"원래 우리나라 웬만한 산들은 화강암이 많지요. 나리도 아시겠지만 화강암은 단단하기로는 제일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단단한 화강암도 물 앞에서는 어쩔 수 없지요."
"물이라……."

현감은 턱수염을 쓸어내렸어.
"다른 웬만한 돌들이야 정을 박고 장정 몇이 달려들어 쇠망치로 내려치면 쪼개지니 시일도 얼마 안 걸리지요. 하지만 단단한 화강암은 정을 박고 그 자리에 물을 부어놓아 그 물이 얼면서 바위에 틈을 내기를 기다려야 하지요. 그 일을 한번만 하는 게 아니라 틈이 나면 또 그 틈이 난 자리에 정을 박고 또 물을 부어 얼어서 벌어지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니 비둘기 바위같이 크고 단단한 바위일수록 시일이 몇 곱절 더 걸리지요."

"몇 곱절이라면 얼마나 걸린단 말인가?"
신유 현감은 조바심이 나서 물었어. 조만간에 임기가 끝나 한양으로 떠나야 하는데 어떻게든 이번 여름 안에 마무리 짓고 싶었던 거야.
"이제 갈수록 날이 따뜻해지고 있으니 물이 얼기를 기다리려면 올 겨울은 지나야지요. 적어도 내년 봄이 되어야 일이 마무리 될 것입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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