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식 학교에 가지 못한 응어리를 풀다
정식 학교에 가지 못한 응어리를 풀다
  • 강진신문
  • 승인 2022.04.25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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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옛 이야기 - 남성리 영랑길 4]
옛날 학교 금서당(Ⅱ)

강진군은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강진 이야기를 발굴하고 계승하기 위해 지난 2019년부터 매년 '우리 동네 옛이야기' 책을 발간하고 있다. 책 편찬에는 강진 출신 김옥애, 강현옥, 장미연 동화작가가 글로, 김충호 화백이 그림으로 참여하고 향토사학자 양광식 강진문사고전연구소장의 감수를 받았다.

올해 세 번째 펴내는 강진 이야기 동화책에는 남성리 영랑길의 역사, 문화 이야기 6편을 오일파스텔 삽화와 함께 책에 담았다.

'우리 동네 옛이야기' 남성리 영랑길 편에 가까운 옛날 실존했던 인물들과 유적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내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강진의 역사를 살펴보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관서제(금서당)

 

두 소녀는 도시락을 싸들고 길을 나섰어. 압구재(군청쪽에서 서문정으로 넘어가는 작은 재의 이름)를 지나자 사람들로 복닥복닥 시끌시끌해. 금릉학교 운동회에 강진읍내 사람들이 다 구경나왔나 봐.

"금례야, 오기를 잘했지?"
"응, 재미있어."

소녀들은 사람들 대열에 끼어서 걸었지. 들녘에는 봄꽃들이 만발하고, 금례의 가슴은 구름을 탄 듯 설레었어. 드디어 도착!

"야, 모래사장이다."
"학생들 좀 봐."

이때 사립금릉학교 교장이 한 말씀 하셨어.

"에, 학부모님 여러분. 에, 화창한 날씨입니다. 금릉학교 춘계운동회를 넓은 백사장에서 치르니 모두 참석하여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모이는 곳이니 자연 장사꾼도 모여들었어. 엿장수, 과자장수들이 인기가 많았지. 어른들 손님을 겨냥한 그릇장수, 신발장수, 단술장수도 있었어. 군민들은 모처럼 시름을 내려놓고 한바탕 어우러졌단다. 오랜만에 보는 평화롭고 정겨운 풍경이었지. 금례와 점례는 과자점 앞에서 떠날 줄 몰랐어. 돈이라고는 일전도 없었으니 사 먹을 수도 없었지. 침만 꿀꺽꿀꺽 삼켰더란다.

"자, 한 개씩 먹어라."
보기 안쓰러웠는지 과자장수가 눈깔사탕 두 개를 건넸어.

"아, 아니에요."
금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어. 하지만 점례는 달랐지.

"감사합니다. 아저씨."
과자를 덥석 받았더란다.

"그래, 그래야지."
아저씨가 활짝 웃었어. 둘은 모퉁이를 지나기가 무섭게 사탕을 입안에 넣었어. 쭉쭉 빨자, 단내가 진동했어.

"오매 맛있다야!"
한바탕 호들갑을 떨었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체육 선생님이 목청을 높였어.

"여러분, 오전 경기가 끝났습니다. 배고프시죠? 지금부터 싸오신 점심을 맛있게 드시고, 오후 2시에 다시 운동회를 이어가겠습니다. 달리기와 줄다리기가 남아있으니 마을 별로 준비하시고요. 맛있게들 드십시오."

금례와 점례도 그늘진 곳을 찾아서 도시락을 꺼냈어.
"우와, 찐 계란이다."

금례는 기분이 좋았어. 귀한 계란에 주먹밥이라니. 둘이 똑같이 계란을 나눠먹었어. 물을 마셔가며 꼭꼭 씹었지. 밥을 먹으면서 금례는 생각했단다. 금릉학교에 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매미소리가 요란한 여름날,

"금례엄마, 들었는가?"
임씨 부인이 말문을 열었어.

"무얼 말인가요?"
"국채보상운동 말이야."
"네."
"금례 엄마는 알고 있었구먼. 믿고 하는 말이네만, 사실 우리 집 양반이 관련이 크다네. 일본순사들이 가만있으려나 싶어."

임씨 부인은 종갓집 종부인데 일손이 부족할 때마다 금례엄마를 불러들였어. 얌전하고 말수가 없으니 밖으로 말 물어낼 리 없고, 바느질솜씨가 뛰어나니 옷은 입을 만했거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조선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라서 일본 순사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사실 저도…."
"무얼?"
"아, 아니에요. 먼저 말씀하세요."
"아니, 갈수록 일본 놈들이 극성이라 걱정이지."

 

임씨 부인이 한숨을 쉬었어.
"염려마세요. 제 집안 빚을 갚겠다는데 사람을 잡아가기야 하겠어요."
1904년 1차 한·일 협약 이후 일본은 차관을 들여서 우리나라의 재정을 압박하는 정책을 세웠어. 빚을 들여와 경제를 망치려는 속셈이었지. 그러면 조선이 일본에 예속되리라 여겼던 거야.

그러자 전국적으로 국채보상운동(1907년 2월에 대구에서 시작된 국권회복운동으로 전국민이 합심하여 일본에 대한 국채를 갚아 경제적으로 독립하자는 운동)이 퍼져나갔어. 일본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 학교를 중심으로 지주, 상인, 부녀 층은 물론 인력거꾼, 하층민까지도 모금운동에 참여했어. 두 여인은 바로 그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란다.

"나는 속 좁은 아녀자라 우리 집 양반 다칠까봐 걱정이라네."
"너무 걱정 마세요."
그제야 임씨 부인은 빙그레 웃었어. 금례 엄마가 더욱 미덥게 느껴졌지. 일손은 물론 말벗까지 되어주니 말이야.

"고맙네. 그리고 이거 품삯(품을 판 대가)이네."
임씨 부인이 돈을 내밀었어.
"그리고 이건 금례 먹여. 고기 조금 쌌네."
"번번이 이러시면 제가 면목이……."
"알지 않은가 내 마음. 늦었으니 어서 가시게."

"저도 드릴 게 있어요. 이거."
"아니, 이건 패, 패물(귀금속 따위로 만든 장식물) 아닌가?"
"금례 주려고 아꼈던 건데 나라를 구해야 우리 아이의 미래도 있지 않겠습니까."
"금례아버지도 다쳐서 일을 못한다면서……."

"세 사람 입에 풀칠이야 못하려고요."
"금례 학교 보낸다더니?"
"다음에 보내도 되고요. 부디 받아주세요."

"고집은…. 알겠네. 자네 뜻을 전하겠네."
"고맙습니다."

두 부인은 잡은 손을 놓지 못했더란다.
"엄니, 소학편은 댓구(둘 이상의 글귀)로 이루어졌네요?"
금례가 물었어.

"그렇지. 그래야 뜻이 명확하고 익히기가 편하지 않겠니?"
금례어머니는 웃으며 대답했어. 그러자 금례가 잠시 망설이더니,

"아부지는 글을 모르시는데 어떻게 엄니는 글을 아세요?"
하고 물었어. 금례 어머니는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단다.
"네 아버지는 글을 배울 기회가 없으셨고, 나는 글을 배울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지."
"아~"

"그러니 배울 기회가 왔을 때는 기를 쓰고 배워야 한다. 알았지?"
"네, 엄니. 그런데 이 책은 어디서 났어요?"
"네 할아버님의 유산인 셈이지."
"그럼 엄니는 할아버지한테 글을 배웠겠네요?"
"그렇지."

금례는 왠지 뭉클했어. 입을 다물고 땅바닥에 글자를 쓰기 시작했단다. 고(古), 금(今), 예전과 지금, 사(事), 리(理), 사물의 이치. 세 번 네 번 익힐 때 까지 썼어.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화하지 않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했지. 하늘, 땅, 사람이 변함없을까? 그런 생각.

1911년 유월, 어느 아침이었어.
"금례야, 어서 입어보렴."
어머니가 불쑥 옷을 내밀었어.

"이건 새 옷이잖아요?"
"맞아, 네 엄마가 며칠째 짓던 거란다."
아버지가 말했어.

"추석도 아닌데……."
금례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이 옷 입고 학교에 가자꾸나."

어머니가 말했어.
"네? 그럼 저 금릉학교에 입학하는 거예요?"
"맞아. 조금 늦었지만…. 이젠 공립교로 개편되었단다."
"정말이지요?"
"그렇다니까."

금례는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어. 행여 꿈인가 제 볼을 꼬집고는,
"아얏!"
아파서 다시 뛰었더란다.
"아이고 그렇게 좋아?"

모녀는 끌어안고 서로 볼을 부비고 난리도 아니야. 금례아버지는 몸을 돌려 몰래 눈물을 닦았단다. 허리를 다쳐서 오래도록 일을 못하고 있으니 식구들 볼 낯이 없었지. 금례는 깨끗이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어. 어머니의 손잡고 금릉학교 가는 길, 금례는 주변을 두리번거렸어. 누가 안 봐주나 하고. 그때,

"금례야."
기분 좋아서 돌아다보니 하필 점례네.
"저, 점례야……."

미안해서 말을 잇지 못했어.
"쪽 빼입고 어디 가는데?" 점례가 물어.
"점례야, 우리 금례 금릉학교에 다니기로 했단다."

금례어머니가 말했어.
"아, 그렇구나."
점례가 시무룩해하더니 고개를 떨치고 지나갔어. 금례는 마음이 아팠어. 속으로 생각했지.
'점례 공부는 내가 도와줘야지.'

금릉학교 작은 마당에 사람들이 많이도 모였어. 교장선생님이 한 말씀 하시는데 금례는 자꾸 두리번거렸어. 혹시나 하고. 그런데 뒷줄에 윤식이, 현구, 부진이가 나란히 서있는 거야. 그럼 그렇지.

금례는 어깨를 쫙 폈어. 흠흠, 소리도 내고 말이야. 벌름대는 콧속으로 시원한 바람이 타고 들어오자 금례는 기분이 좋았어. 하늘만큼 땅만큼.
'기회가 왔으니 기를 쓰고 배워야지.' 작은 주먹을 불끈 쥐었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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