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적색 신호등
[기고] 적색 신호등
  • 이선옥 _ 신전면
  • 승인 2022.03.14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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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옥 _ 신전면

차는 목적지를 향하여 힘찬 시동을 걸었다. 도로는 뻥 뚫려있고 좌우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 신선한 공기가 아침 햇살에 춤을 춘다. 발끝은 힘찬 에너지로 가속페달을 재촉하고 차는 먹이를 쫓는 짐승처럼 사납게 질주하다 느닷없이 나타난 적색 신호등에 '끽'하는 비명을 지르며 멈췄다. 정신이 아찔하다. 순식간에 끔찍한 장면들이 필름처럼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다.

'대형 사고겠지? 차와 사람은 부서지고 거리는 아수라장이 됐겠지?'

긴장으로 팽팽해진 가슴을 쓸어내리며 전면 거울을 쳐다본다. 신호대기 없이 가속페달을 밟는대로 신나게 달리기만 하면 좋을 텐데 적색 신호등은 나의 질주에 브레이크를 잡게 한다. 사실 그리 급한 일도 없는데 운전대만 잡으면 왜 마음이 바빠지는 것일까!
 
어쩌면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속도에 길들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내 안에 꿈틀대는 욕망의 갈증을 채우기 위해 쉴 새 없이 달려야 하는 인생의 도로에서 나의 질주를 잠시 멈추게 하는 적색 신호등이 나를 살려준 셈이다.

묵정밭에 자라난 잡초처럼 가난은 나의 손마디를 자주 쑤시게 할 때가 많았다. 뽑아내도 금방 무성해지는 잡초와 씨름을 벌이고 나면 잡초 사이에 피어난 풀꽃들로 아름다운 꽃밭을 이루었다. 그즈음 내 마음의 묵정밭에도 어느샌가 인내와 겸손의 고운 꽃들이 피어났다. 꽃들은 반짝이는 이슬을 머금고 가난을 닮은 이웃들을 불러들이고, 가난으로 찢긴 생채기를 서로 어루만져 주면서 삶의 속도를 조절해주었다. 그래도 길든 습성을 고치지 못하고 다시 과속을 일삼을 때가 참 많았다.

인생의 목표가 일이 되어서 숨이 멎을 만큼 쉴 새 없이 일만 쫓다가 질병의 적색 신호등에 잡혀 꼼짝없이 멈춰서야 했다. 태생적으로 몸이 약해서 짐을 조금만 져야 하는데 용감함을 가장한 욕망이란 녀석이 내 약점을 노린 것이다. 운전대를 놓아야 할 것 같은 고통과 두려움이 나를 점령했다. 자동차라면 고장 난 부속을 교체하면 되겠지만 사람의 몸엔 교체할 수 없고 회복 불가능한 부속들이 더러 있어서 육체의 부속 일부를 상실하고 골골거리며 도로를 주행해야하는 상황에 맞닥뜨린 것이다.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의 주인공 바흠은 땅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악마는 바흠에게 하루 동안 걸어서 해지기 전에 출발한 언덕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표시한 땅을 모두 주겠다고 유혹했다. 바흠은 많은 땅을 얻기 위해 욕심껏 땅을 표시하고 겨우 목적지에 돌아오지만 도착하는 순간 입에서 피를 토하고 죽는 비극적인 결과를 맞이하고 말았다. 결국 그가 차지한 땅은 무덤 넓이의 공간뿐이었다. 어쩌면 이야기의 주인공 바흠과 같은 어리석음에 빠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존재의 의미를 상실할 것들을 위하여 겁없이 날뛰기만 하다 욕망의 사지가 꺾였으니 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이란 선물을 어떻게 살아내야 선물의 가치대로 행복을 누리는 것인지 숙고하지 못한 게으름의 결과일 수도 있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친다는 속담처럼 질병의 고난은 삶의 우선순위와 인생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물음표를 던져주었다. 가늠할 수 없도록 까마득히 먼 길만 같았는데 벌써 본향이 가깝다. 해는 서산으로 기울고 거리는 한산해졌다. 이제는 달리고 싶어도 달릴 필요 없는 시간, 육신은 점점 낡아져서 덜커덩거리는 소리가 낯설지 않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충분히 늙었다."는 하이데거의 말을 떠올리며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바쁘게 달려오느라 보지 못했던 거울을 자주 들여다볼 일이다. 마음속에 늘어 붙은 상처의 흔적들도 닦아내야 한다. 목숨처럼 붙들고 있었던 자존심도 던져버리고 온유함으로 마음을 넓혀가야 할 때이다. 육신의 눈은 점점 흐려져도 마음의 눈이 흐려지지 않도록 서재에 불을 오래 밝혀 두어야 한다. 늙음이 가져오는 상실의 공간을 두려움과 절망이 차지하지 못하도록 새로운 소망의 나무를 심어야 할 때이다. 무엇보다 내게 남은 시간을 죄다 팔아서라도 못다 한 사랑을 살 수만 있다면 아낌없이 허비하여 이웃들과 함께 한바탕 멋진 잔치를 즐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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