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숨결이 느껴지는 고성사 종소리
다산의 숨결이 느껴지는 고성사 종소리
  • 강진신문
  • 승인 2022.02.28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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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옛 이야기 - 남성리 영랑길 2]
고성사 저녁 종소리(Ⅱ)
고암모종

 

강진군은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강진 이야기를 발굴하고 계승하기 위해 지난 2019년부터 매년 '우리 동네 옛이야기' 책을 발간하고 있다. 책 편찬에는 강진 출신 김옥애, 강현옥, 장미연 동화작가가 글로, 김충호 화백이 그림으로 참여하고 향토사학자 양광식 강진문사고전연구소장의 감수를 받았다.

올해 세 번째 펴내는 강진 이야기 동화책에는 남성리 영랑길의 역사, 문화 이야기 6편을 오일파스텔 삽화와 함께 책에 담았다.

'우리 동네 옛이야기' 남성리 영랑길 편에 가까운 옛날 실존했던 인물들과 유적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내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강진의 역사를 살펴보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선생은 오랜만에 만난 아들에게 공부를 시키려 했으나 주막집(밥과 술을 팔고 나그네를 묵게 하는 집)은 너무 시끄러웠어.

군입(얻어먹는 객식구)이 늘어나니 주막집 주모의 눈치도 보이고 말이야. 그래서 보은산방으로 올라와 잠시 신세를 지기로 한 거지.

은봉스님의 말처럼 부자는 무릎을 맞대고 주역(유학 오경 중 하나)과 상례(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와 맏아들의 상사(喪事)에 관한 의례)를 독하게 공부했더란다. 호롱불(호롱에 켠 불) 꺼지는 날이 없을 정도였어.

그즈음 백련사 혜장선사도 보은산방을 찾았더란다. 그뿐인가? 동문 밖에서 산방어른의 제자들이 올라왔고, 해남에서도 간간이 사람들이 왔단다. 누구든 왔다하면 밤을 새가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갔어. 금동의 공부도 덩달아 깊어졌지.

"이제 소학(초학자들의 수양서)을 떼었으니 대학(사서의 하나)을 공부하자꾸나."
스님이 웃음기를 거두었어.
"달달 외우고 쓸 때까지 공부할 것이다. 명심하렷다."
스님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했지.
"옛!"

금동은 스님이 건넨 책을 받고 물러났어. 돌아와 책장을 열고 냄새를 킁킁 맡았더란다. 책에서 먹 향기가 났어. 묘한 기분이었지. 금동은 문을 박차고 나가 남당포를 내려다보았어.

어머니가 살아계신다면 대학 공부에 들어간다고 자랑하고 싶었지. 해는 뉘엿뉘엿 지는데 눈물이 절로 나왔어. 눈물을 씻고 막 돌아서려는데 인기척이 느껴졌어. 돌아보니 산방에 든 손님이야. 이름이 학연이라던가? 눈빛이 유독 맑고 깨끗한 청년이었어.

"금동스님, 미, 미안한데 도움을 청할 일이……."
학연(정약용의 아들)이 말을 더듬거렸어. 금동은 형 같은 학연에게 마음이 끌렸어.
"네, 말씀하세요."
"공양주께 말씀드리기가……."

학연은 실과 바늘이 필요하다고 했어. 금동이 곧 구해다 주었지. 이후 두 사람은 부쩍 친해졌단다. 어른들이 없을 때는 금동은 학연을 형님이라고 불렀어. 안된다고 손을 휘젓던 학연도 금동을 말리지 못했어.

"형님은 좋겠어요."
"뭐가요?"
"부모 형제가 있잖아요?"
"금동스님은 그게 부러웠나보군요?"

"네, 저는 너무 외롭고 쓸쓸해요."
"그렇겠군요. 하지만 나는 금동스님이 부러워요."
"고아가 부럽다니요? 어리다고 놀리는 거예요?"

"그, 그럴 리가요. 불법난봉(佛法難捧)이라 했는데, 좋은 스님 만나서 불제자(불교에 귀의한 사람)가 되었잖아요."
"치, 잘난 체는? 그런데 불법난봉이 무슨 뜻이죠?"
"부처님 법 만나기가 어렵다는 말씀이에요.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힘들다고 했어요."

"그럼 형도 나처럼 스님이 되든가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학연의 눈빛이 왠지 쓸쓸해 보였어.
뎅 뎅 뎅 뎅 뎅

산사에 종소리가 울렸어. 그 소리는 깊고도 웅장했단다. 30리 밖 구강포(90포) 바다에 떠 있는 뱃전에도 닿을 정도였어. 달빛처럼 은은하게 스며들었지. 산방어른은 늘 같은 자리에서 바다를 바라보았어. 금동이 남당포를 바라보듯 말이야. 말하지 않아도 산방어른의 쓸쓸한 심정을 느낄 수가 있었어.

뎅 뎅 뎅 뎅 뎅
금동은 종소리가 하늘까지 닿기를 바랐어. 어머니가 별이 되었다면 종소리를 들을 거라고 생각했지.
"금동스님!"

산방어른이 불렀어. 금동은 잡념으로 멍했던 터라 깜짝 놀랐지.
"네?"
"스님은 어떤 소리가 제일 듣기 좋습니까?"
"그야 고성사 종소리가 제일 좋지요."
"어허, 어쩌면 나랑 똑같단 말이오?"

산방어른이 환하게 웃었어. 가지런한 이가 보일만큼.
"산방어른도 종소리를 좋아하신단 말씀입니까?"
"그럼요. 그런데 금동스님, 강진 팔경이 뭔 줄 아십니까?"
"팔경이요?"

"네, 강진의 뛰어난 풍경 말입니다. 알려드릴까요?"
"좋아요."
"강진 팔경은 금사리 새벽안개, 금강의 여울, 구강포(90포)의 고기잡이 불빛, 만덕산 아지랑이, 서산에 지는 해, 비파산의 달밤, 대섬으로 돌아오는 돛단배랍니다."
"아~"

금동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할 때였어.
"금동아, 뭣 하느냐? 법당으로 건너오지 못할까?"
강진 팔경은 금사리 새벽안개, 금강의 여울, 구강포(90포)의 고기잡이 불빛, 만덕산 아지랑이, 서산에 지는 해, 비파산의 달밤, 대섬으로 돌아오는 돛단배랍니다."
은봉스님의 불호령이 떨어졌어.

"맞다. 저녁예불."
금동은 부리나케 뛰어갔지. 찻물도 날라야하고 공양 음식도 옮겨야 했거든.
해가 떨어지면 산과 강이 얼어붙었어. 금동은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산방에 군불(오로지 방을 덥히려고 아궁이에 때는 불)을 땠단다. 손님들과 친해지고 공부에도 재미를 붙였지.

"금동스님!"
학연이 불렀어. 금동은 나무더미를 깊숙이 밀어 넣고 바깥으로 나왔어.
"왜요?"
"아버지가 부르십니다."

학연의 눈망울이 촉촉했어. 안으로 들어가자 산방어른이 금동의 손을 꼭 잡았어.
"금동스님! 그동안 우리 뒷바라지하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올 것이 왔구나.'
금동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지.

"목리에 사는 제자의 집으로 거처(일정하게 자리를 잡고 사는 곳)를 옮기기로 했습니다."
손에서 산방어른의 온기가 느껴졌어.
"스님, 오십 가까이 살아본 중늙은이의 부탁이라고 여기고 들어주세요. 사내대장부가 할 일은 오직 공부뿐입니다. 지금처럼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셔야 합니다."

당부가 끝나자 보자기로 싼 물건을 꺼냈어.
"손때가 묻은 보잘 것 없는 물건입니다. 부디 받아주세요."
금동의 손에 쥐어주었어.
"어르신, 가지 마세요."

금동이 울음을 참으며 말했어. 산방어른의 눈빛이 흔들렸어.
다음날, 날 새기가 무섭게 산방어른의 제자들이 들이 닥쳤단다. 마치 포졸들인 양 금동은 무섭고 두려웠어. 인상을 잔뜩 쓰고 노려보았지.

"아이고 금동스님 무섭습니다."
"선생님을 잘 모실게요."
"목리는 요 아래 동네입니다. 가까우니 자주 놀러 오십시오."

위로가 끝나자 제자들은 산방어른을 모시고 우르르 내려갔단다. 순식간이었어. 학연이 자꾸 뒤를 돌아다보았어. 동생 같은 금동이 마음에 걸렸겠지. 은봉스님은 걱정말라며 손을 흔들었어.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가자 산사(산속에 있는 절)는 다시 고요해졌어.

"금동아, 오늘 공부는 쉬자."
스님이 금동의 등을 토닥거렸어.
금동은 손님들이 묵었던 방으로 쏙 들어갔어. 벽에 붙은 산방어른의 시가 금동의 마음을 쓸쓸하게 했지.

우두봉 아래 있는 규모가 작은 선방,
대나무가 조용하게 짧은 담을 둘러있네
작은 바다풍조는 낭떠러지와 연해 있고,
고을 성의 연화는 산이 첩첩 막았어라.
둥그레 한 나물 통은 중 밥자리 따라다니고,
볼품없는 책 상자는 나그네 행장이라네.
청산이면 어디인들 못 있을 곳이 있나,
한림의 춘몽이야 이미 먼 옛 꿈이라네.
산방을 둘러싼 대나무 숲에 바람이 깃들면, 새들도 몰려와
울곤 했었지.

"식량이 부족해서 자주 나물죽을 끓여 올렸는데……."
잘 모시지 못한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뒤척이다가 윗목에 놓인 보자기를 발견했지. 금동은 조심스레 보자기를 풀었어. 책, 벼루, 먹, 붓 자루가 쏟아졌어.
"사내대장부가 할 일은 오직 공부뿐입니다!"

산방어른의 말씀이 떠올랐어. 바로 그때였어.
뎅 뎅 뎅 뎅 뎅
종소리가 울렸어. 금동은 범종 앞으로 다가갔지.
"금동아, 점심공양 하자."
은봉스님이 빙그레 웃으며 당목을 힘차게 내리쳤어.
뎅 뎅 뎅 뎅 뎅

종소리가 산사를 감싸고돌았어. 공양주가 금동의 얼룩진 눈자위를 닦아주었지. 그리고 금동을 꼭 보듬어 주었어. 어머니처럼. 부처님처럼. 보리는 좋아라, 꼬리를 흔들었고.
뎅 뎅 뎅 뎅 뎅

종소리는 경내를 돌아 산 아래로 울려 퍼졌단다.
오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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