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창백한 숲
[다산로] 창백한 숲
  • 유헌 _ 광주전남시조시인협회 회장
  • 승인 2022.01.10 16: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헌 _ 광주전남시조시인협회 회장

나는 걷기를 즐긴다. 걸으면서 생각하고 걸으면서 글도 쓴다. 무작정 걷기도 하지만 이야기가 있는 곳으로 다가서듯 걷기도 한다.

새해 첫날 특별한 곳을 정해 걷거나, 해가 뜨는 곳에서 출발해 석양이 물드는 해변에서 한해를 마감하는 식이다. 지나간 자리, 특별한 모습들은 중계방송하듯 글로 옮기면서 걷는다.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별수 없다. 걷는 게 좋으니까.

요즘 걷기 열풍을 등에 업고 둘레길이라는 이름의 새 길이 유행처럼 생기고 있다. 그런 길들은 처음부터 목적을 갖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걷기에 편해 찾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지자체에서 큰돈을 들여 이런 좋은 길들을 만들어준 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둘레길 때문에 생긴 그늘은 없는 것일까. 양지뿐일까? 둘레길로 인해 산의 허리는 잘려 나가고, 등짝에는 포클레인이 지나가기도 한다. 그런 길을 걸을 때면 짓뭉개진 풀잎들이 피를 흘리고, 잘려 나간 생목들의 고통 소리가 들리는 듯해 불편해질 때도 있다.

입장을 한번 바꿔 보자. 길이 난 자리, 긴 세월 그곳을 지켜온 숲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냥 그대로 편안할까. 나만 좋으면 그만일까. 밤낮없이 군홧발 같은 등산화가 지나갈 때마다 산짐승들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숨을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잡담에 놀라 작아질 대로 작아진 심장을 움켜쥐며 구르듯 나뒹굴며 바위틈을 찾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수면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사뿐사뿐 걸을 수는 없다. 최소한, 작은 산을 생선 허리 토막 내듯 요리조리 큰 상처를 내지는 말자는 얘기다. 이해 되지 않는 일 중의 하나는 등산객들이 자기 편할 대로 또 지름길을 내는 일이다.

그러잖아도 동물들 삶의 터전, 안전지대가 좁아질 대로 좁아진 숲속에 둘레길이 내질러가고 그것도 모자라 등산객들이 다시 길을 낸다면 동물들은 떠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떠나기 전에 아마 상당수 산짐승이 삶을 마감할지도 모른다.

얼마 전 둘레길을 걷다가 순간 긴장한 적이 있었다. 등산길의 청설모가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치는 소리에 내가 더 놀라버린 것이다. 그 청설모는 근처 나무줄기를 타고 줄행랑을 치다가 갑자기 멈추더니 가지 끝에 거꾸로 매달려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3초가 여삼추라, 짧은 순간이었지만 무척 길게 느껴졌다. 난 그 녀석과 눈을 맞추고 기 싸움을 벌이다가 순간 궁금해졌다. 나에 대한 그의 생각이. 인간의 콧노래 한 소절도 자신들에게는 흉기가 될 수 있다고 외치고 있지는 않았을까.

지금부터라도 자연을 훼손하는 둘레길은 최소화하고 코스도 자연의 모습 그대로 물이 흐르듯 순리대로 돌아가는 길이었으면 좋겠다. 비록 가느다랗고 볼품없이 자란 나무라 할지라도 굳이 베어낼 필요가 없다면 길이 그 자리를 피해가야 한다. 우리가 조금 돌아가면 된다. 걷기 위해 찾은 산이 아닌가. 신작로 같은 넓은 길이 아니라 스치듯 비껴가는 운치 있고 정감 있는 오솔길이면 더 좋겠다. 이미 만들어진 길이라도 이용 빈도가 낮은 길은 과감히 입구를 막아 그들을 쉬게 해줘야 한다. 나무도 살리고 산의 속살도 더 보호하고.

숲속 길가의 조명도 문제이다. 밤마다 대낮처럼 불을 밝힌 불빛 때문에 저녁 숲의 낯빛이 창백하게 굳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일까. 지자체는 밤에 산을 찾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불을 켤 수밖에 없다고 얘기할 것이다. 관광객들에게 야경을 자랑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연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일 때 가장 자연스럽다. 낮인지 밤인지 혼돈이 계속된다면 숲속의 질서는 깨지고 말 것이다. 잎사귀는 시들시들 말라가고 산짐승, 날짐승은 불면의 밤을 뒤척일 수밖에 없다. 자연이 병들면 그 깊은 상처는 부메랑 되어 우리 인간을 덮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자연과 함께 걷고, 자연과 함께 꿈을 꿀 수 있는 환경이라야만 우리도 행복해질 수 있다. 상생은 자연이 우리에게 건네는 최고의 선물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