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첫눈 내리는 날, 산보가 즐겁다.
[기고] 첫눈 내리는 날, 산보가 즐겁다.
  • 김점권 _ 전 포스코건설 중국지사장
  • 승인 2021.12.27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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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점권 _ 전 포스코건설 중국지사장

고향에 첫눈이 내렸다. 예년에 비해 약간 늦은 첫눈이라고 한다. 사실 지난 11월 말경부터 예보되었던 눈 소식은 막상 당일이 되면 슬그머니 겨울비로 바뀌곤 하였다. 첫눈에 대한 감상은 나이에 관계없나 보다. 마침 아내가 서울에서 내려와 있는데, 하얗게 내리는 첫눈을 둘이서 맞이하게 되는 것에 아내는 무척 상기되었다.

첫눈은 매봉산에서 불어오는 북풍을 등에 업고 매섭게 쏟아지고 있다. 이런 날이라도 아내와 함께 산보에 나서야겠다. 이런저런 옷가지를 겹겹이 걸치고 과감한 눈 맞이 산보에 나섰다. 아내는 소녀처럼 첫눈의 느낌과 둘이서 같이 걷는 것에 대해서 아주 즐거워했다.

아내와 결혼생활 35년, 적지 않은 세월을 살 만큼 살았고, 긴 세월만큼이나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아내와 함께 첫눈을 맞으며 함께 걸으며, 자연의 아름다움과 고향의 구석구석 사연을 정답게 나눌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사실 필자는 산과 걷기를 좋아하는 것에 반해서 아내는 조용하게 실내 생활을 즐겨 했으나, 유방암 치료 이후 의사의 조언에 따라 저녁 식사 후 산보를 시작하였다. 처음 산보를 시작할 때는 사실 즐겁지 못했다. 50여 분 산보하는 동안 대화는 종종 부딪혔으며, 의견 충돌로 인해 각자 떨어져서 돌아오거나, 심한 경우에는 일방이 먼저 돌아오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럼, 문제는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당연히 필자는 아내에게 문제가 있다고 하고, 아내는 백 프로 남편 때문 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산보 횟수가 늘어나면서, 말다툼은 줄어들고 싸워서 각자 돌아오는 횟수도 줄어들고, 목소리는 낮아졌다. 누가 반성한 것인가? 당연히 힘있는 남편이 반성 혹은 양보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부부간에 대화, 이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남편의 일방적인 의사 결정 과정에 아내가 순응한 것은 결코 마음으로 동의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가정의 평화와 전쟁이 싫어서 양보한 것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차분하게 산보하면서 대화하다 보니, 이런저런 의견 교환을 하게 되고 아내의 반론에 적응하지 못한 남편이 처음에는 우격다짐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약간의 양보와 설득의 기술을 익히게 되었으며, 가장 중요한 아내의 고충과 처지를 이해해 주고 배려해 주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럼 요즈음 산보에는 대화가 평화로운가?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 아내는 걱정이 많은 편이다. 아니 걱정을 사서 하는 편이다. 이것이 종종 대화를 그르친다. 하지만 이제 생각의 요령이 생겼다. 아내가 잔소리 하는 것은 건강하기 때문이다. 지난 시절 아내가 몸이 아파서 불편할 때는 그 잔소리마저도 없었다.

1년 사계절, 어두워지는 저녁무렵에 아내와 산보를 하다 보면 이런 저런 멋진 자연 풍광을 접하게 된다. 특히 시골에 와서 산보는 아름다운 자연과의 대화다. 혼자서 걸을 때야 혼자 즐기면 되지만, 둘이서 걸을 때는 아름다운 자연 풍광에 대한 자연스러운 공감대와 정서적 교류가 필요하다.

봄날 논에서 울어대는 개구리 맹꽁이 소리, 풀벌레 소리, 해 질 무렵의 찬란한 석양 노을, 하얗게 빛나는 보름달과 은하수, 저수지 물속에 그려진 또 다른 수채화, 가을 황금 색깔, 겨울 들판에 쌓인 하얀 설경을 아내와 함께 공감하려면 남편이 평소에 노력해야 같이 즐길 수 있다.

거참, 나이 육십이 넘어서 인생을 겨우 조금씩 알게 되고 사람이 돼가는가 보다. 2021년 첫눈이 푸짐하게 내리고 있다. 북풍한설에 몰아치는 눈보라였지만, 아내와 나는 풋풋한 연애시절의 산보를 하였다. 고향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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