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일 고단함 잊고 하나되는 강진 줄다리기
농사일 고단함 잊고 하나되는 강진 줄다리기
  • 강진신문
  • 승인 2021.12.20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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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옛 이야기 - 서성리 만세길 11]
청사초롱 줄다리기(Ⅰ)

 



최근 강진군도서관이 지역의 숨겨진 역사, 문화를 스토리텔링으로 엮은 두번째 우리 동네 옛이야기를 발간했다. 도서관은 지난 2019년부터 전해져 오는 강진의 수많은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발굴 계승하기 위해 연 1회 연차적으로 우리동네 옛이야기를 발간하고 있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나온 '우리 동네 옛이야기'는 '서성리 만세길' 편으로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6편의 강진읍 서성리와 관련된 전설 같은 우리 역사, 문화 이야기가 정성스럽게 담겨 있다. 이 동화책은 지역의 향토사학자인 양광식 강진문사고전연구소장의 감수를 받아 지역 출신 김옥애, 강현옥, 장미연 동화작가가 직접 쓰고, 지역 출신 김충호 화백이 그림으로 참여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란 말을 들어 보았니? 아무리 하찮고 쉬운 일일지라도 혼자 하는 것 보다는 두 사람 이상이 힘을 모으면 훨씬 낫다는 뜻이야. 하물며 농사짓는 일은 백짓장을 맞드는 일 보다는 백 곱절, 천 곱절은 힘든 일이야. 그러니 당연히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야만 했어. 농사일 중에서도 모내기와 벼베기 등 같은 시기에 많은 일손을 한꺼번에 필요로 하는 벼농사는 더 그랬지. 그러니 옛날엔 같은 마을 사람들끼리 오랫동안 원수처럼 지낼 수가 없었단다. 어제 사소한 일로 말싸움을 하고 주먹다짐까지 오갔다 하더라도 오늘은 멋쩍게 웃으며 얼싸 안아야만 했지.

강진은 탐진강이 남해로 흘러들면서 펼쳐 놓은 넓은 평야 지대로 옛날부터 주로 벼농사를 많이 지었어. 그래서 일의 고단함을 잊고 여럿이 일할 때 흥을 더해줄 농가나 협동심을 길러줄 놀이 등이 발달했지. 이번엔 그 중에서 강진의 줄다리기에 대해 들려줄까 해.

줄다리기는 벼농사를 짓는 중부 이남지역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지. 그 중에서도 우리 강진이나 영암, 장흥 일대의 줄다리기는 줄의 크기나 줄다리기를 하는 인원수 등 그 규모가 유별나서 전국에서도 알아줬대. 오늘날 우리가 하는 줄다리기는 기껏해야 줄의 지름이 5센티미터쯤 되고 길이만 해도 100미터를 넘지 않지? 하지만 옛날부터 내려온 강진의 줄다리기는 줄의 앞부분인 고의 지름만 해도 해도 2미터를 넘고 줄의 길이는 200~300미터나 되었다하니 그 크기만도 어머 어마했겠지? 그럼 이제부터 강진의 줄다리기 이야기를 들어볼래?

따당 따당 땅따당 상쇠인 돌이 아버지의 꽹과리 소리가 농악대 장단의 시작을 알렸어. 꽹과리 소리는 서문 안 사장나무 가지를 타고 올라 서문, 탑골, 남문을 넘어 남포까지 퍼져나갔어. 꽹과리 소리를 시작으로 덩기 덩기 더덩 덩기 다당 다당 다다당기 가뭄에 단비 내리듯 장구 소리도 장단을 맞췄어. 꽹과리 소리와 장구 소리를 따라 동네 조무래기들은 모두 나와 풍물패를 따르기 시작했지.

징 징 지잉. 천둥 소리 같은 징소리가 동네 최고 어르신처럼 풍물가락을 뒤에서 묵직하게 받쳐 주었지. 그리고 또 묵직한 징소리만큼이나 나이 드신 교장 선생님께서도 서문 앞으로 나오셨단다.

이 즈음엔 서문에서 시작된 경쾌한 꽹과리 소리가 성벽을 타고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 나가고 있었지. 그 뒤로 서문 아이들은 물론이고 탑골과 남문 쪽 아이들까지 붙어서 꼬리는 점점 길어지고 있었어. 그 꼬리 중간쯤에 입을 헤벌쭉 벌리고 쫄래쫄래 따라가고 있는 훈이가 보였어. 돌이는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어.

얼마 전 훈이랑 구슬치기를 했는데 돌이 구슬을 다 따가서는 인정머리 없이 하나도 돌려주지 않았거든. 아무리 이겨서 딴 거라지만 같은 골목사는 친구끼리 그건 정말 너무한 거였지. 그래서 설 전에 이장인 훈이 아버지가 집집마다 볏짚을 모으러 다니며 돌이 집에 오셨을 땐 괜히 인사도 안 했지 뭐야. 그 속을 알 리 없는 어머니는 또 예의 없다며 돌이만 혼내셨지. 그래서 돌이는 그 뒤로 이래저래 훈이가 미워서 계속 말도 않고 지내고 있었던 거야.

따당 따당 땅따당. 덩기 덩기 덩더덩. 지이잉 지이잉.
점점 무르익어가는 농악 소리에 힘을 받아 줄을 멘 장정들은 서부쪽 줄을 들고 중앙로로 나섰어. 다른 지역 줄다리기는 보통 보리논을 밟는데 강진은 특이하게도 동서로 기다란 모양인 강진 읍내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중앙로에서 행해졌어.

아버지 말씀으로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랬다고 해. 길에서 줄다리기를 해서 그런지 참여하는 사람도 구경하는 사람도 많아서 줄다리기를 할 때마다 사람들로 바다를 이루곤 했지.
"동부 사람들 왔다아아! 숫줄 왔다아아!"

대열 앞에서 누군가 외쳤어. 그러자 서부 쪽 사람들은 그 말을 메아리쳐서 뒤로 전달했지.
"숫줄 왔다아아아! 동부 사람들 왔다아아아!"

올해는 서부 사람들이 암줄을 맡았어. 그래서 서부 쪽 사람들은 볏짚을 모으던 섣달그믐 전부터 서부 쪽이 이길 거라고 좋아했어. 줄다리기에 사용되는 줄은 암줄과 숫줄이 있는데 암줄을 쥔 편이 이겨야 그 해 농사가 잘 된다는 말이 예로부터 은근히 전해 오거든. 그래서 암줄을 쥔 편은 줄을 준비할 때부터 이미 기세가 한껏 올라 있곤 했어. 그래서 돌이도 벌써 서부 쪽의 승리가 결정되기라도 한 것 마냥 기대에 부풀어 있었지. 줄을 옮기거나 어깨에 메기 위해서는 고 머리 바로 밑부분부터 길이 4~5m 정도의 나무 7~8개를 가져다가 2m간격으로 묶어나가지. 이걸 어깨에 멘다고 해서 '멜대' 또는 지렛대'라고 하는데 이 멜대가 다 묶여지면 멜대에 대목을 매달아.

그리고 대목엔 아이들이 줄다리기 행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청사초롱을 매달았어. 청사초롱을 매다는 것도 다른 지역과는 구별되는 우리 강진만의 독특한 모습이지. 암줄과 숫줄이 만나면 곳대로 두 줄을 연결하기 전에 마을을 도는 의식이 진행됐어. 줄을 메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도는 동안엔 앞부분을 메기는 설소리를 이어 구름처럼 모인 사람들의 후렴구가 따라 붙었지.

"어라디야 저라디야 상사로세"
서문 마을 풍물패 상쇠인 돌이 아버지가 먼저 후렴구로 시작을 했어.

"어라디야 저라디야 상사로세"
따르는 농악대를 비롯하여 줄을 멘 장정들, 길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후렴구를 다시 한 번 더 부르며 기운을 돋구었단다.

"어라디야 저라디야 상사로세. 어라디야 저라디야 상사로세."
"이 농사를 어서 지여 나라 봉양을 하고 보세."
"어라디야 저라디야 상사로세. 어라디야 저라디야 상사로세."
"저 달이 떠서 장군이 되고 저 별은 떠서 군사가 되네."
"어라디야 저라디야 상사로세. 어라디야 저라디야 상사로세."

후렴구로 흥을 돋우며 여러 가지 들노래를 부르다 보면 암줄과 숫줄은 어느새 다시 중앙로로 들어서고 있었어. 암줄과 숫줄의 고가 본격적으로 줄다리기를 시작한 강진 터미널 앞에 내려졌어. 양쪽 줄을 따르던 농악 소리는 신명난 장단으로 또 한바탕 흥을 돋았지.

그리고 그 사이로 여러 동네 어머니들이 함께 준비한 주먹밥을 나눠줬어. 그럴 땐 줄이 너무 길어 자기 쪽에서 밀려나 상대편 쪽 주먹밥을 얻어먹는 경우도 종종 있었어. 그럴 때면 또 어머니들은 장난으로 이렇게 을러메곤 했어.

"동부 쪽 주먹밥을 묵었응께 인자 넌 동부 쪽 젖줄을 잡아야 한다 잉!"
그러면 그게 뭐 큰일 날 일이라고 아이들은 놀라서 인파 속을 헤집어서라도 자기 편 줄을 찾아가고는 했어. 젖줄은 큰 줄에 연결되어 잔뿌리처럼 빠져나온 곁줄을 말해. 큰 줄은 지름이 70cm가 족히넘으니 제 아무리 힘 센 장정이라 하더라도 큰 줄을 잡고 끌 수는 없지. 그래서 큰 줄엔 젖줄을 많이 연결하는데 그 모양은 마치 수많은 잔뿌리가 붙은 기다란 무 같았단다.

"달 뜬다!"
누군가 외치자 주먹밥을 들고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동문 쪽 하늘을 올려다봤어. 음력 정월이라 해가 지고 찬기가 스미는 판이었는데 떠오르는 보름달에 사람들은 다시 힘이 났지. 모두들 달에 소원을 비느라 잠시 조용해졌단다.

돌이 아버지도 이 때 만큼은 꽹과리를 내려놓고 돌이가 공부 잘하기를, 가족들이 모두 건강하기를 빌었단다. 돌이는 새해엔 동네 구슬을 다 따게 해달라고 빌었어. 큰 소원이 아니니 달님이 반드시 들어줄 거라 믿으면서 말이야.

사람들은 각자의 크고 작은 소망을 담아 정월 대보름 달님께 빌고 또 빌었어.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 둘 눈을 떴을 땐 달보다 환한 청사초롱들이 중앙길을 대낮같이 밝히고 있었단다.

전립을 쓴 상쇠인 돌이 아버지가 꽹과리 신호를 주며 일어섰어. 그 뒤로 서문 농악대가 주류를 잡고 각 마을에서 온 농악대가 합류했어. 농악대는 상쇠와 부쇠만 전립을 쓰고 모두 고깔을 썼는데 청사초롱 불빛을 받아 고깔에 매달린 청, 홍, 황, 백색의 꽃송이들이 가을날 국화처럼 피어났단다. 돌이는 줄다리기보다 청사초롱과 알록달록한 고깔 꽃송이들을 보는 게 더 설레고 신이 났어.

"파죽하세!" "파죽하세!"
달을 보고 소원 빌기가 끝나자 돌이 아버지랑 풍물패가 큰소리로 파죽을 알렸어. 파죽은 말 그대로 대를 터트리는 일이란다. 강진은 한겨울에도 기후가 온화한 편이어서 대나무가 잘 자라는 곳이야. 그래서 돌이가 사는 서문 마을에도 대나무 숲으로 뒤를 두른 집들이 많았어. 한겨울 소복한 눈꽃을 달고 샛바람을 막아주는 대숲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그 어떤 액운도 다 막아줄 것만 같았지.

"자, 액운은 모두 물러가고 새해에도 좋은 일들만 가득 들게 하소서."
향교 학장님이 나오셔서 굵직한 대나무들을 쌓아놓은 곳에 불을 붙이셨어. 타다닥 탁탁. 조금씩 일어난 불꽃은 금세 큰 불길로 자라나 달에라도 닿을 듯 싶었지. 타다닥 탁탁.

불길이 점점 치솟아 오르자 올해도 기어이 꼬맹이들 울음을 터트리게 하는 그 소리가 보름달을 향해 터졌어.

타당! 탕! 탕! 탕!
"아아악! 앙! 으앙!"
아니나 다를까? 올 해에도 울음보를 터트리는 꼬맹이가 나오고 말았지.

"오메! 액운 쫓을라다가 우리 집 애기 잡겄소."
훈이 옆집 새댁 아줌마가 세 살배기 아기를 얼른 안으며 말했어. 그 소리에 또 모두들 한바탕 신나게 웃었지. 본격적으로 줄다리기를 하기 전에 고싸움이 시작되었어. 작년엔 고싸움도 줄다리기도 모두 서부가 져서 한동안 동부 쪽 아이들을 보면 괜히 자존심이 상하곤 했지. 그래서 돌이를 비롯한 서부 쪽 아이들은 올해는 고싸움부터 이겨 초반부터 기세를 꽉 잡고 가기를 바랐단다.

고싸움에서 덕석기가 빠질 순 없었지. 특히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 오를 것 같은 커다란 용이 새겨진 서문의 덕석기가 뜨면 돌이랑 훈이는 어깨가 으쓱해졌어. 그도 그럴 것이 서문 마을 덕석기는 다른 마을 것보다 배는 크고 문양도 화려했거든.

두두두두 둥두둥.
싸움을 알리는 북소리는 고에 올라탄 줄패장과 고를 짊어진 장정들의 심장까지 두두두둥 뛰게 만들었어. 올해는 키 크고 어깨가 떡벌어진 훈이 삼촌이 기수가 되어 얼굴이 벌개지도록 깃발을 흔들어 댔어. 슬쩍 곁눈질로 보니 훈이 녀석은 어깨가 한껏 치솟아서는 친구들한테 막 삼촌 자랑을 해대는 것 같았어. 그러다 돌이와 마주치자 씩 웃는 거야. 하지만 돌이는 부럽기도 하고 시샘도 나서 웃는 훈이를 외면해버렸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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