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떠날 때 무엇을 남길 것인가
[다산로] 떠날 때 무엇을 남길 것인가
  • 김제권 _ 수필가
  • 승인 2021.11.22 02: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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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권 _ 수필가

내가 태어나 처음 죽음이란 것을 생각해 봤던 때가 예닐곱 살이었다.

어머니께서 아침밥을 먹으면서 몹시 서운하셨던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오메 불쌍하다 그 어린 젖먹이를 두고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나는 직감으로 오랫동안 앓아누운 친구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머니를 잃은 친구가 가엾다는 생각에 밖으로 나가 친구 집을 바라봤다. 벌써 친구가 살고 있는 초가지붕에 하얀 옷이 걸려 있고 마을 사람들이 나지막한 헛간 옆에서 웅성거렸다. 하얀 두건을 쓴 상여꾼들이 남새밭에 놓인 꽃상여를 허리에 메고 집 주위를 돌자 친구와 그에 누나들이 통곡하며 상여 뒤를 따라갔다.

친구 아버지는 한량이면서도 재주가 많았다. 동네에 혼인 잔치가 있으면 음식 배분 책임을 맡아 보았고, 초상이 있을 때는 상여 끝에 올라서 워낭을 흔들며 구슬픈 소리로 망자의 혼을 달랬다. 그도 아내가 떠나던 날은 말없이 아내의 상여 뒤를 따라갔다.

나는 어려서부터 집과 가까이에 있던 교회를 다녔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다시 살아나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가면 죽었던 사람이 서로 만날 수 있다는 설교 말씀을 자주 들었다. 어린 나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절대 죽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친구 어머니는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죽었다며 안타까워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어디일까 고민하던 시기에 살붙이 죽음을 지켜본 때가 오십대 중반이다. 나와 세 살 터울인 누이가 암과 사투를 벌이다 끝내 호스피스 병동에서 숨을 거둘 때다. 누이가 남아있는 마지막 불꽃을 태우느라 숨을 몰아쉬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차마 볼 수가 없었다.

형제와 자매는 한 몸에서 한 피를 받아 태어났기에 동근연지(同根連枝)라고 한다. 그래서 형제의 죽음은 몸 반쪽을 베어내는 고통과 같다는 뜻으로 할반지통(割半之痛)이라고 한다.

누이는 불과 몇 달 전까지도 본인은 절대 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누이는 오히려 나에게 가족을 위해 돈을 많이 벌어야지 글 나부랭이 쓴다며 시간을 낭비하며 책상 구석에 앉아 있지 말라고 충고했다.

이런 누이가 화장터 불가마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하던 날, 인생 생로병사라고 하지만 죽는 것도 별거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톨스토이 작품 중에 『사람은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가 있다. 주인공은 지주의 농장에서 평생토록 머슴살이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주인이 그를 불러 귀가 솔깃한 제안을 했다.
"내일 해가 뜨는 순간부터 해가 질 때까지 네가 밟고 돌아오는 땅은 모두 너에게 주겠다."

그는 새벽을 기다리느라 한숨도 자지 못했다. 날이 밝자마자 달리기 시작했다. 한 뙈기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끼니도 걸으며 잠시도 쉬지 않고 미친 듯이 뛰었다. 더 많은 땅을 보상을 받겠노라고 뛰고 뛰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주인집 대문으로 뛰어 들어간 순간 기진맥진해 쓰러졌다.

그리고 끝내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다. 자신이 묻히게 될 무덤은 3평이면 족했다. 일생동안 머슴살이를 하며 뛰고 뛰어 자기 것으로 만든 땅이 고작 3평이 전부였던 것이다.

인간은 한 치의 앞을 보지 못하고 이웃에게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간다. 낙천적으로 살다 갔던 한 시인이 생전에 읊었던 시의 한 구절처럼 지상에서의 아름다운 삶 소풍 온 것처럼 살다가 오늘 밤에 하늘이 부르면 가야 하는 인생이다.

우리 주변에서 지나친 욕심 때문에 오랫동안 공들여 쌓은 탑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린 안타까운 모습을 볼 수 있다. 양쪽 손에 떡을 쥐고 더 많은 것을 차지하겠노라 먹지도 쓰지도 않고 인색하게 살다가 어느 날 소리 없이 저 세상으로 가버린 사람들이 많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란 말이 있다. 인간이 태어났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뜻이다. 사람이 죽어서 향기를 남길 것인가 악취를 남길 것인가는 본인이 걸어온 삶의 궤적을 통해 후세 사람들이 평가하게 된다.

나는 20대 후반부터 허파에 바람만 잔뜩 담고서 40대 후반에 이르도록 정치판을 기웃거린 적이 있다. 허황된 야망을 품고 살았던 나는 인생의 황금기를 혹독한 대가를 치르며 살았다. 유방백세 유취만년(流芳百世 遺臭萬年)이란 말이 있다.

아름다운 향기는 백대에 걸쳐 흐르지만 악취는 만년에까지 전해진다는 뜻이다. 내가 죽어 후세에 아름다운 향기를 남기지 못할지라도 악취는 풍기지 않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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