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들의 정신, 다산초당을 다시 살리다
주민들의 정신, 다산초당을 다시 살리다
  • 김철 기자
  • 승인 2021.11.01 1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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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박물관 '다산초당, 함께 잇-다' 특별전 개최

 

정다산유적보존회 결성 65주년 기념 2021년 다산박물관 특별전...보존회 사업추진보고서 등 공개

지난 26일 강진군 다산박물관(관장 윤재평)에서 '다산초당, 함께 잇-다' 특별전 개막식이 열렸다.

개막식에는 이승옥 군수와 위성식 강진군의회 의장, 관계 공무원들이 참석했으며 특히 '정다산유적보존회' 윤재은 회장의 후손들과 다산초당 재건에 힘을 실어주었던 유재의 선생의 후손, 재건에 동참했던 귤동, 덕산, 보동, 마점, 율포, 표장마을 이장들이 함께해 자리를 빛냈다.

이번 특별전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이 해배 된 후 130여 년이 지난 뒤 폐허가 됐던 다산초당을 복원하기 위해 모금 운동을 주도했던 '정다산유적보존회'의 결성 65주년을 기념하고, 다산 정약용의 정신을 잇고자 기획됐다.

이번 전시는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이 다산초당 입주해 원림으로 가꾸는 이야기, 초당에서 살아가는 이야기, 초당에서 이룬 업적과 그가 떠난 후 폐허가 된 초당을 다시 복원했던 이야기 등 4가지 주제관으로 구성됐다.

 

특히 이번 특별전에서는 다산이 가난에 힘들어하는 제자 윤동에게 직접 써준 '부환설'과 초당의 재건과정이 설명되어있는 '사업추진보고서' 등 총 60여 점을 볼 수 있다.

새롭게 선보이는 유물은 다산이 가난에 힘들어하는 제자 윤동에게 직접 써준 '부환설 증언첩'('부'라는 것은 '환영'에 불과하다)과 다산초당 재건의 과정이 기록된 '정다산유적보존회 사업추진보고서' 3건 등을 최초로 선보인다.

'사업추진보고서'는 다산초당 재건사업을 위해 온 군민들이 모금에 참여한 내용과 군민들이 돌아가며 수많은 목재와 기와들을 산 중턱까지 함께 나르며 다산의 정신을 잊고자 노력했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희귀 자료이다. 사업추진보고서는 정다산유적보존회 윤재은 회장이 적은 글이다.

사업추진보고서를 자세히 보면 사업추진 경과보고를 통해 동기, 준비, 발기인 회의, 추진상황 등을 열거하고 건립사업 추진 경과를 통해 목재 구입 및 운반, 공사착수 및 추진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초당 개기제, 상량식 택일, 상량문 촉탁, 상량식 안내서 인쇄, 상량식 준비 등의 과정도 각각 적혀있다. 또 회계보고서를 통해 수입 및 지출, 재산목록, 회원 방명록 등을 확인할수 있다.

사업추진보고서는 다산초당 재건기를 통해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재건기를 보면 순조 조선 신유(1801년) 교옥(敎獄)사건에 강진으로 유배되어 8년간 읍거(邑居 ; 그 마을에 거주)시 그 기거(起居 ; 자고 먹고 하는 등의 일상생활을 하다)가 불안하시던 중 귤동처사 윤단(尹慱·1744-1821)의 산정(山亭) 유운각(蕤芸閣)으로 이거, 비로소 안정케 되었다.

이로부터 유운각이 선생의 11년간 장구지소(杖屨之所) 되었으므로 일반이 다산초당이라 호칭하였다.

지금으로부터 60여년 전에 붕괴 된 후 그 재건을 기도하여 왔으나 금일까지 그 성과를 보지 못한 재은(在殷)은 뉘우쳐 탄식함으로 여겨 오던 바 차종채, 유재의 양씨의 앞장 선 모연금(募捐金)이 기초가 되어 1956년 양력 10월 26일에 정다산유적보존회를 조직하고 유지 첨원들의 성원하에 심혈을 기울여 추진 한 결과 1957년 3월 7일에 기공하여 금년 5월에 준공을 고함에 즈음하여 다산초당 재건 사실의 원인과 자세한 전말을 약술한다고 적고 있다.

다산초당을 재건하게된 계기도 적고 있다. 1955년 8월 전남대학교 문리과대학장 이혁(李赫) 교수를 위시하여 이을호(李乙浩), 변극, 양상하, 최문헌 교수가 강진 귤동에 있는 정다산유적 조사차 방문하여 다산선생께서 18년간 기거하시면서 5백여 권의 저서를 저술하시던 초당의 유지(遺址)가 공허하게 있음을 개탄스럽게 여기고 다산초당 재건사업추진을 강조하고 후일 초당 재건을 위하여 YMCA에 금일봉을 기탁했다. 이어 이혁 학장과 광주시 계림동 경양방죽(현, 홈플러스 주변부지)에서 더위를 피해 바람을 쐬면서 우리나라 문화발전을 위하여 나에게 다산초당 재건사업추진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요청했다. 이런 역설에 감격하여 윤재은 회장은 사업 추진에 공헌할 것을 결심했다.

이어 1956년 8월 16일 강진읍 차종채(車種彩), 유재의(劉載義) 두 분이 솔선하여 특별회원 가입금으로 각 금 20만환씩 의연금을 기부하였다. 이 의연금을 기본으로 하여 발기 준비에 착수한다고 적고 있다. 다산초당의 재건에는 주민들 모두 힘을 합해 적극 참여했다.

사업추진보고서를 보면 1957년 3월 10일 일요일 신기리 산판목재 운반을 개시하여 매일 덕산, 보동, 마점, 율포, 표장의 각 동의 순서로 출역 운반하기로 하다. 이 날은 귤동이 우선 출역하였는데, 부역인부 19명, 출역인부 점심은 윤강하, 윤재찬, 윤재화, 윤중학, 윤재청, 윤주봉 각 댁에서 순차로 접대하기로 하다. 점심 쌀은 윤재은 가에서 공급한다고 적혔다.

1957년 3월 19일 화요일에는 정적골 목재운반을 개시하여 각 동리가 순차로 출역하기로 하다. 귤동 제2차 출역 개시하다. 목재운반 총동원 인부 236명. 부역인부는 200명(귤동, 덕산, 보동, 마점, 율포, 표장리 출역), 임금인부는 36명(귤동, 덕산리 고용)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인근 지역 주민들이 모두 참여해 만든 다산초당이라는 것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다산초당공사의 어려움도 적고 있다. 생각지 못하게 부편수로 있던 목수 이용주가 죽어서 세상을 떠남으로 새로운 목수를 고용하지 아니하면 서까래를 걸 수가 없는 형편이다. 계약금으로는 공사가 완성할 수 없는 실정에 봉착하여 첫째는 선금을 지불 할 현금이 없고, 둘째는 보통 임금을 지출하기로 고용하게 되면 부채를 면치 못하게 되어서 공사가 중지가 된 형편이다고 있다.

이번 다산특별전은 주민들의 땀과 노력으로 재건된 다산초당의 과거를 엿볼수 있다. 전시회를 통해 마을주민들의 정신을 오롯히 느끼기에 충분하다. 

 

윤회장 손녀 윤영옥씨 특별전 개막식 참여
"윤재은 회장이 있어 다산초당이 복원됐다" 


특별전을 통해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바로 정다산유적보존회 윤재은 회장이다. 개막식에 손녀 윤영옥와 친지들이 방문해 다시한번 윤 회장의 공적에 대해 강조했다.
손녀 윤영옥씨는 "어릴적 매일 다산초당을 찾아갔던 것이 기억이 난다"며 "다산초당 앞에 위치한 연못을 직접 만들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송령(松嶺) 윤재은(尹在殷) 회장은 도암면 귤동마을 331번지에서 1894년 1월 29일 태어나 1967년 2월 14일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자녀는 5남2녀를 두고 있고 직손 7남5녀, 외손 3남5녀로 알려져 있다.
윤 회장은 1914년 3월 사립 오성학교 제4회 졸업, 1919년 3월 사립 보성전문학교 상과 제7회 졸업(현 고려대학교)한 재원이었다. 해방 전에는 주식회사 조선상업은행 장흥 순천지점 지배인을 거쳤고 해방 후에는 조선전업주식회사 상무이사 겸 경리부장을 지냈다. 지난 1957년부터 1967년까지 10여년간 정다산유적보존회장을 맡으면서 다산초당 본관 복구 및 사업 추진에 나섰다.
1958년 3월에는 문교부장관표창을 받았다. 오랜 세월 파손된 민족 문화재를 성심과 성의를 다해 보존 보호하는 한편, 수많은 험로와 중첩된 난관을 극복하고 이를 복구 보수한 것과 평소 헌신적인 노력을 인정받아 수상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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