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새와 나
[다산로] 새와 나
  • 유헌 _ 시인·수필가
  • 승인 2021.11.01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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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헌 _ 시인·수필가

산골에 산지 여러 해가 되었다. 월출산 자락에서 말이다. 거기가 무슨 산골이냐고 갸웃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냥 산골이라는 말이 좋다. 산촌의 연둣빛 숲이 좋고 검푸른 신록이 좋다. 순아순아 단풍이 드는 감나무골이 좋고 폭설로 그린 설경이 좋다.

산이 거기 있어 날마다 운동도 한다. 월출산 자락 녹차밭 주변까지만 가면 산책이고, 경포대 계곡을 오르면 등산이다. 집에서부터 걸어서 산을 가면 산책과 등산이다. 저녁을 먹고는 가볍게 동네 한 바퀴를 다시 돈다. 걷고 또 걸을 수 있어 좋다. 산촌에서 그렇게 살고 있다.

걸으면 보인다. 논틀밭틀길에 들국화가 지천이고 벼논도 시나브로 물이 든다. 콩밭도 노래졌다. 월출산 천황봉에 걸린 구름도 서나서나 시시각각 모습을 바꾼다. 이처럼 계절은 항상 어김이 없다. 입춘인가 싶으면 입하고 어느새 입추와 입동으로 이어진다. 계곡 바람을 타고 사계(四季)가 성큼성큼 달려오곤 한다.

가을의 문턱을 넘으니 까치와 삔추의 발걸음도 바빠진다. 오르르 몰려왔다가 우르르 날아간다. 추수를 앞둔 논밭을 무차별 공격한다. 그야말로 전쟁이다. 새와의 전쟁 말이다. 새의 날갯짓이 바빠질수록 새를 쫓기 위한 농부들의 고심도 깊어간다. 허수아비는 고전이고 알록달록한 오색 줄도 무용지물이다. 깡통을 두드려도 그 때 뿐이다. 커다란 독수리 연을 매달아 감시하지만 그것도 그리 신통력을 발휘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새와 인간, 언제부터 서로 불편한 사이가 되었을까. 어렸을 때 교과서에서 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익조(益鳥)와 해조(害鳥)에 대해서 말이다. 그래서 막연하게 인간에게 이로운 새는 제비, 해로운 새는 참새 정도로 생각을 했다. 제비는 해충을 잡아먹고 참새는 방앗간을 걍 지나가지 않는다.

그런데 웬걸. 까치가 문제였다. 참새는 조족지혈(鳥足之血), 새발의 피였다. 우리 집 마당 잔디밭에도 참새가 많이 날아오지만 벌레를 잡아먹는지 그냥 잘 놀다가 포르르 날아간다. 까치는 달랐다. 감이 익기도 전에 먼저 쪼고 심지어 텃밭의 고추까지도 붉은 부분부터 먹어치운다. 까치소리는 아침을 여는 노래요, 까치가 울면 손님이 온다는 말도 모두 거짓말처럼 돼 버렸다. 까치까치 설날도 빛이 바랬다.

어느새 새가 농부들의 생계까지 위협하는 골칫거리가 된지 오래다. 그만큼 새로 인한 농작물 피해가 심각하다는 얘기다. 나야 농사가 주업이 아니니까 새에게 조금은 너그러운 편이다. 자그만 텃밭에다 동네 30세대가 조금씩 나눠서 짓는 몇 줄 공동텃밭 정도가 고작이기 때문이다.

싹들이 나왔다 파랗고 여린 싹들 새들이 날아왔다 떼로 날아왔다 싸그리 거짓말처럼 싹들이 사라졌다. 한 줄을 더 심었다 여분으로 더 심었다 새들이 날아왔다 떼로 또 날아왔다 간간이 거짓말처럼 싹들이 올라왔다.
-유헌「새와 나」전문


난 특별히 새를 좋아한다. 참새, 그 자그만 것들이 나뭇잎 속으로 순식간에 숨어드는 걸 지켜보고 있으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폴짝폴짝 뛰어가는 까치를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언제부턴가 내가 아닌 새의 입장이 되어보니 친구가 됐다. 마당의 과일은 조금씩 새와 나눠먹으면 되고, 2수로 된 나의 시조 「새와 나」처럼 콩은 여분으로 한 줄 더 심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 그러니 편하다. 자연이 좋아 찾아온 산촌에서 나까지 새와 대결하며 살 수야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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