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초당(茶山艸堂)현판의 진실
다산초당(茶山艸堂)현판의 진실
  • 강진신문
  • 승인 2021.10.24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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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문화해설사 신영호의 강진이야기(다산초당)

 

다산초당이 있는 귤동마을의 입향조는 해남 윤씨 족보에 따르면 윤취서(尹就緒 1688~1766)이며 거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만덕산 양지쪽에 산정을 짓고 차(茶)를 심고 죽(竹)을 모종 내고 다산초당(茶山草堂)이라 호(號)를 내걸어 세거(世居)에 전하게 했다"라고 씌어있다. 다산이 강진으로 귀양 와서 초당에 살 때는 다산서옥(茶山書屋); 다산의 책을 갖추어 두고 공부하는 방 1807.3.16.시문집)-다산초당 양광식 저- 다산초당이라는 말은 귤동의 입향조인 윤취서부터 쓰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산이 배소를 초당으로 옮겨 살 때는 다산서옥이라 불리웠다.

1993년 발행된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편에서는 다산과 추사의 현판 글씨라는 소제목에는 다산초당 현판을 이렇게 쓰고 있다.

다산과 추사의 현판 글씨

"<다산과 추사의 현판 글씨>" "이 초당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내 눈길을 끄는 것은 현판 글씨이다. 행서로 씌어 진 다산초당(茶山艸堂)과 예서를 변형시켜 쓴 '보정산방' 모두 천하 명필 추사 김정희 글씨이다. 이 중 다산초당은 추사의 글씨를 집자 해서 만든 것인지라 글씨의 크기와 획의 흐름이 어수선하여 볼품없는데 '보정산방' 네 글자만은 추사의 중년 명작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유홍준 저-

여기서 유홍준 교수는 다산초당의 현판 글씨가 볼품이 없는 집자 해서 만든 추사 글씨라고 말하고 있다. 추사 글씨를 집자해서 만든 내력에 대해서는 어느 곳에도 말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내력이 없는 것인지 못 찾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견해를 달리하는 또 다른 다산초당 현판에 관한 글이 있어서 소개하고자 한다. 작가이자 교육자로 활동하고 계신 이성현 '추사코드'라는 책의 내용이다. "저 멀리 전라남도 강진 땅에서 19년이나 귀양살이하셨던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를 찾아가 보자 19년간의 긴 유배 생활을 하던 다산 선생께서는 귀양살이가 끝날 날만 학수고대하며 19년을 허송세월하지 않았다. 농부는 남의 땅이라도 빈 땅을 보면 호미부터 챙겨 들기에 농부이고, 선생은 아이들을 보면 이름이라도 묻게 되기에 어디서든 가르치게 마련이다.

다산선생 또한 천생이 선생인지라 팍팍한 귀양살이에도 그곳에서 만나는 아이들의 또랑또랑한 눈망울에 끌렸던지 작은 글방을 세우고 아이들을 이끌어 주시게 되었고 선생이 선생인지라 코찔찔이들이 반듯한 청년으로 자라나니 강진 땅이 반듯해졌다. 훗날 제주 유배길에 이곳을 지나던 추사가 다산 선생이 키워낸 제자들의 반듯한 모습을 보았던지 선생이 귀양살이하던 배소에 걸어둘 현판글씨를 써 주었다. '다산초당 茶山艸堂이다'라고 쓰고 있다. 이글은 작가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다산과 초당에 대한 깊은 지식이 없는 듯 한 것 같다.

매년 다산 박물관에서는 1년에 한 번씩 가을에 다산 특별전을 개최한다. 작년 2020년에는 코로나19 영향으로 다산특별전을 개최하지 못하다가 올해 2021년도에는 가을 특별전을 준비하기로 하고 준비모임을 갖게 되었다. 준비모임에서 올해의 다산 특별전의 주제는 '다산초당'으로 결정되었다. 또한 올해는 다산초당 복원하기 위한 창립일로부터 65주년이 되기도 한 해여서 더욱 뜻이 깊을 것 같다. 그동안 여기저기서 모은 초당 복원에 관한 자료들이 모아지게 되었다. 그 자료 중 무엇보다도 미국에 이민 가서 살고있는 다산의 제자 윤종억(종벽) 후손인 윤재은(송령)의 아들 영돈씨가 70년 초에 미국으로 이민갔었다. 아버지 재은씨가 돌아가시고 미국 이민 간 영돈 씨마저 소식이 한참 동안 끊기고 말았다가 1986년 6. 29선언이 나오면서 국내도 모든 게 자유스러워졌다. 또한 다산에 관한 연구 활동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이후 다산과 그의 유물은 학술적 가치가 해가 다르게 높아져만 갔다.

왼쪽부터 보물 제1683-1호 <다산 4경첩>, 보물 제 1683-2호 <하피첩>


특히 다산의 유물 가운데 우리나라의 보물 제1683-1호 <다산 4경첩>, 보물 제 1683-2호 <하피첩>이 선정되면서 다산 유물은 더욱 귀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앞으로도 보물이 될 수 있는 다산 유물은 어떤 것이 있을까? 1812년 유배 중 다산과 제자 초의, 윤동(종심)이 성전에 있는 월출산으로 등반을 갔다가 백운동 풍광과 경치에 반하여 시도 쓰고 초의에게 백운동도를 그리게 하여 첩을 만들어 백운동 주인 이덕희에게 선물로 준 백운첩이 보물 될 가치가 충분히 있어 보인다.

또 다른 유물 중에 보물이 될 만한 것이 있다면 1818년 8월 그믐날 다산은 해배 소식을 듣게 되고 다산초당의 18제자들과 다신계를 맺고 꿈에 그리던 고향 마재로 돌아가 가족 품에 안기게 된다. 제자들과 맺은 차로서 신의 다신계절목이 전해온다. 어느 땐가 다신계책이 사라져 종적이 없어지게 된다. 그런데 70년대에 미국에 이민 가 있던 영돈 씨가 몇 년 전에 다신계 책을 이메일로 다산박물관으로 보내왔다.

자료가 궁금하던 다산박물관과 강진군은 그동안 설왕설래했던 다신계 존재를 확인하게 됨으로 국가 보물 급에 해당하는 다산 유물을 소장할 수 있다는 기대가 커지면서 영돈 씨 아버지인 재은 씨에 대한 공덕비 건립에 힘을 쏟고 추진하게 되었다. 또 그가 보낸 메일에는 다산초당 복원에 관한 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내용도 같이 왔었다.

다산초당 유적 보존회 중요한 내용들을 살펴보면
1957년 3월 7일 다산초당 착공일
1957년 5월 26일 다산초당 상량식
1958년 4월 25일 다산초당 준공일
1959년 5월 5일 다산초당 낙성일

이러한 일정으로 다산초당은 복원건립 된다. 다산초당 유적 보존회 기록에는 초당의 현판과 주련에 대한 기록도 상당부분 밝히고 있어서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단기 4290년(1957) 12월 4일 수요일(음10월13일) 산정리 고서화가 김영리 씨를 심방하였더니 다산초당 현판의 글씨는 김추사 서에서 집자 하는 것이 합당하다 하며 자기가 이미 집자에 적당한 서자를 마음속으로 정하고 있으니 이를 본떠 가라 하여서 현판 글자와 주련 글자를 본떠서 왔다"라고 쓰고 있다.

그렇다면 재은씨가 이미 산정리 김영리 씨한테서 다산초당현판 글씨를 추사 선생의 글씨 중에서 집자하여 받아 왔다는 사실이었다. 이를 현장을 통해서 확인하기 위해서 도암면 산정리 지인을 통해서 수소문 해 보았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산정리 출신 선배 되신 김응선 씨를 모시고 산정리 마을로 향하였다.

산정리에는 김영리 라는 분은 안 계신다는 마을 사람들의 일관된 말이었다. 우리가 말한 그런 분은 그때 당시 고서화가를 취급하면서 화가를 하셨던 분은 김영하 씨라고 하며 일제 강점기 때 경찰서장을 지내셨으며 학식과 재력을 갖추신 분으로 전국 규모의 골동품을 거래했다고 한다. 57년에 추사를 알고 그에 글씨를 집자할 정도로 서예에 식견이 있던 지식인이었다면 김영하 씨가 틀림없다는 결론이었다.

산정리 마을에서 그의 막내아들이 생존하고 산다고해서 막내 아들 집을 찾았다. 마을 입구에 조그마한 시골집이었다. 그때 당시 막내 아들은 어려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었는데 그의 어머니께서 아버지의 유품이라면서 건넨 그림(포도도)이 전부라면서 그분의 집 거실 벽에 걸려 있었다. 사진을 찍고 확인해 보니 호는 유당(攸堂)이고 김영하 씨가 맞았다.

당시 다산초당 보존회 기록을 필사하던 재은 씨 큰아들 영현 씨가 하(厦)를 리(履)로 잘못 기록 하였던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김영하를 김영리로 썼던 것이다. 김영하 씨는 해남이 고향으로 일제 강점기 이후 해방이 되고 고향에서 살기 어려워서 이곳 산정리로 이사왔었다. 그는 이곳으로 이사 와서도 상당한 학식과 재력으로 당시 군수, 서장 등 군 유지들이 수시로 집을 다녀 갔으며 골동품을 전시해 놓은 사랑채도 별도로 있었다고 동네 분들은 증언하고 있다.

또 그떄(60년대) 고서화를 거래했던 저와 지인이고 서예가이신 백사 정윤식 선생께서는 「까치와 호랑이」 민화도 구입한 적이 있다고 귀뜸해 주셨다. 일정에 의해 다산초당이 완공되면서 장부에는 현판과 주련에 대한 서각 비용이 지출된 것이 기록되어 있었다. 현판, 주련 각자, 감독비, 기타로 40만환(현재 화폐 가치는 800만 원 정도 추정)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현판과 주련을 각을 하였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수소문하였더니 다산초당 복원할 때 도편수를 맡았던 장흥군 용산면 어산리 출신 이수길 이란 분의 아들(4남) 용주 씨가 목수를 맡아서 일하다가 갑자기 사망하는 일이 생기고 그 후 도편수 이수길 씨의 손자 이두만을 목수로 일을 시킨다. 그는 초당 복원 목수로 일을 마친다. 그 후 세월이 흘러 그가 광주에 살고 있을 때 해설사 선생님이신 안종희 선배님께서 향토사에 깊은 공부와 관심이 있으셔서 이두만 씨와 궁금한 일이 있으시면 수시로 통화해서 초당건립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시곤 하였는데 2년 전부터 갑자기 전화가 끊기고 돌아가신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본인이 초당 현판, 주련을 제작하였다고 증언해 주셨다고 한다. 지금까지 다산초당 현판, 주련 제작 과정을 정리하자면 다산초당을 복원하면서 강진군 도암면 산정리에서 사시는 김영하 씨가 재은씨에게 추사 글씨를 집자해 주어서 그것으로 장흥군 용산면 어산리에 살고 있는 다산초당 복원 도편수 이수길의 손자 목수 이두만에게 각을 맡겨서 다산초당 현판과 주련의 각을 해서 오늘날 초당의 상징이 된 다산초당의 현판과 주련이 있게 되었다.

다산학에 권위가 있으신 어느 교수님께서는 다산초당의 현판을 평하시면서 추사 글씨 집자도 잘되고 서각도 양각으로 잘 되었다고 말씀하셨던 것이 새삼 기억됩니다.

다산초당의 기둥에 적혀있는 주련을 왼쪽부터 읽어 보자

 신선되어 오름 부질없고 구름사이 작은 섬
 높은 곳 올라 불경공부
 고대 광실 안개에 젖고 별은 빛나네
 새벽 서당 물소리에 취하네

다산초당 현판과 주련을 추적하여 밝혀냄에 있어서 아쉬움이 있다면 그동안 자료가 있었음에도 무관심과 공개를 하지 않아서 진실규명이 늦어져 아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김영하 씨가 추사글씨를 집자 했던 원본(원전)을 찾을 수가 없음이 크게 아쉬웠다. 이후라도 추사 글씨의 원본(원전)을 찾는 일에 힘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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