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귀촌 통신
[다산로] 귀촌 통신
  • 유헌 _ 시인·수필가
  • 승인 2021.09.22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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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헌 _ 시인·수필가

겨자 빛 들판에 산그늘이 지고 있다. 서녘 하늘을 물들이고 있는 감빛 노을이 날아갈 듯 한옥 처마선에 걸려있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고 있다.

그 시각, 강진달빛한옥마을 공동 텃밭. 수류화개, 별유풍경, 별바라기, 휴휴당, 여락제, 보금자리, 해로당, 달빛미소, 너와 나의 둥지, 태양아래 월출산, 화담재 등 색깔 있는 30세대의 푯말이 꽂혀있는 밭고랑 사이에서 매단 씨와 정심 씨, 희순 씨의 호미질이 한창이다.

아마 김장배추를 심고 있는 모양이다. 어제는 쪽파와 갓, 무를 심었다고 들었다. 한참 만에 정심 씨가 텃밭을 나서면서 외친다. "이제 그만들 끝내세. 얼렁 밥 먹고 운동 가야지" 밭둑길을 걸어 나오는 세 여인의 이마에 산들바람이 스치고 지나간다.

서둘러 저녁을 먹고 여인들이 다시 모였다. 산책길에 나선 것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마을길을 지나고 녹차 밭 사잇길을 오를 것이다. 10만 평 강진 설록다원의 포토존 전망대에서 도란도란 얘기꽃을 피울 것이다. 월출산 천황봉에서 쏟아져 내리는 달빛을 줍고 반딧불이를 잡으며 자연과 함께 놀다 내려올 것이다.

그녀들의 관심사는 무엇일까. 자식들이나 건강 문제는 단골 메뉴. 남편들 흉도 조금 볼 것이다. 대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농사 얘기다. 첨엔 그게 이상했다. 귀농 아닌 귀촌을 한 여성들의 화제가 농사라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그런데 사실이었다. 도시에서 삼십 년 이상을 살다 온 사람들이니 텃밭 하나 가꾸는데도 기술과 정보가 필요했다. 파종 시기와 관리 요령들을 틈나는 대로 서로 묻고 알려주고 그러면서 농촌생활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 우리 한옥마을 여성들의 이런 소소한 얘기는 물론 아내에게 들어서 잘 알고 있다.

그런 동네는 집집마다 특별한 이름표를 달고 산다. 우리 집 당호는 달이 밝게 떠오르는 모양의 '휘영청'이고 한옥체험 이름은 '달빛줍기'이다.

은행나무 결 다듬어 당호를 새겨두고, 오며가며 쳐다보고 문틈으로 훔쳐봐도, 달빛은 걸리지 않고 찬바람만 소소하다. 문득 처마 선을 따라가다 눈 닿는 곳, 만월滿月이 둥두렷이 구름 밖을 걷고 있다, 대문을 열어젖히자 집안으로 달려왔다.
 -유헌「휘영청」전문

애저녁 초승달이 용마루에 걸터앉아, 기우뚱 허리 굽혀 수묵화를 그리는 밤, 달빛을 줍고 있는 나, 그림 속을 걷고 있네.
 -유헌「강진달빛한옥마을-달빛줍기」전문

다양한 빛깔로 모인 사람들. 하지만 한 송이 꽃으로 아름답게 피어 어우러져 산다. 시간 나는 사람들끼리 모여 '뜨락'이라는 소박한 이름표를 달고 친목계도 하고, 맛집 나들이도 가끔 한다. 문화예술행사도 기획해 함께 즐기고 있다.

두둥실 보름달이 떠오르는 가을밤에 개최해온 '시월의 달빛콘서트' 때는 산골 마을을 찾아온 관람객들을 위해 사오백 인분 만찬을 준비해 대접하기도 했다. 부녀회를 중심으로 똘똘 뭉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세대를 잇는 바느질 소리'와 '문패 만들기', '월남 댁과 수경 씨 어울려 놀다'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서로를 알아가며 두터운 친분을 쌓기도 했다.

여성들이 나서면 안 되는 일이 없었다. 요즘은 한옥민박과 푸소체험을 위해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찾아오기 때문에 그 일로도 바쁘다.

언니 동생 형님 아우하며 함께 재미나게 살아가는 우리 동네 여인들의 삶을 보면 마을의 미래가 보인다. 3년 후, 10년 후의 변화된 모습이 보인다. 월출산 천황봉 경포대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결이 가을빛으로 시나브로 물들고 있다. 그렇게 강진달빛한옥마을에 가을이 순아순아 깊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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