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올림픽에 출전하다
[다산로] 올림픽에 출전하다
  • 유헌 _ 시인·수필가
  • 승인 2021.08.16 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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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헌 _ 시인·수필가

그랬다. 내가 올림픽에 출전했다. 88 서울 올림픽에 말이다. 올림픽을 앞두고 강훈련도 했다. 경기가 열리는 전국의 현장들을 찾아다니며 실전처럼 연습했다. 살아생전에 이런 기회를 잡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철저히 준비를 했다. 그리고 실제로 금메달도 몇 개 땄다.

벌써 33년 전 일이다. 그리스 헤라 신전을 출발한 성화가 4,200여㎞를 달려 잠실올림픽 주경기장으로 들어왔다. 참으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렇게 지구촌 축제 제24회 서울올림픽은 막을 올렸다. 그 현장에 나도 있었다. 직접 필드를 뛴 선수가 아니라 중계석의 마이크를 잡은 스포츠 캐스터로 올림픽에 참여했다. 경기 종목이 워낙 많고 대회 기간도 길어 몇몇 지역 MBC 아나운서들까지 캐스터로 합류했기 때문이다.

서울 본사에서는 올림픽 개막 몇 년 전부터 올림픽방송단을 구성해 대비를 철저히 했다. 김용 아나운서 실장을 비롯해 차인태 아나운서부장 등 당대 최고의 스포츠 캐스터들을 주축으로 준비에 들어갔다. '서울올림픽'이라는 스포츠 교본까지 아나운서실에서 편찬해 이론 무장을 시켰다.

중계 담당 종목을 미리 정하고 실제로 경기가 열리는 전국의 현장을 찾아 녹음기 앞에서 직접 중계방송을 했다. 나는 수영 종목에 배정됐다. 수영경기가 열리는 곳이면 전국 어디든 찾아갔다. 올림픽 실전이라고 생각하고 현장을 스케치했다. 직접 해설자가 돼 경기를 전망하고 선수의 장점을 소개하는 등 1인 2역까지 했다. 올림픽 개막 보름 전부터는 서울 영등포 소재 MBC 캐스터 숙소에서 합숙에 들어갔다. 

사실 난 유명 아나운서들의 스포츠 중계방송에 매료돼 이미 강진중앙초등학교 시절 아나운서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었다. 당대 최고 이광재 아나운서의 축구, 이철원 아나운서의 복싱 중계 등을 따라 하며 아나운서의 꿈을 키웠다.

초등학교 사오 학년쯤이었을까. 가을 탈곡을 끝낸 볏단 사이사이를 오가며 마당에서 놀던 동네 아이들의 술래놀이까지 중계를 했다. 툇마루 나무 의자에 앉아 옥수수를 마이크 삼아 "행근이 헛간 쪽으로 몸을 숨긴 순간, 행근이 동생 영근이 살구나무 뒤에서 살짝 빠져나와 부엌을 향해 가로질러 달립니다.

말씀드린 순간, 사립 쪽에서 뒷집 복순이 어머니, 고개를 길∼게 빼고 안쪽을 살핍니다. 손에 뭔가를 들고 있는 것 같은데요. 아마 찐 고구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잠시 작전 타임을 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때 복순이 어머니 왈, "나는 어디 라디오에서 나오는 소린 줄 알았네" 그랬다. 나는 그때 이미 아나운서였다. 

드디어 올림픽의 날이 밝았다. 난 매일 숙소를 출발, 올림픽대로를 달려 잠실 실내수영장과 송파에 있는 올림픽 수영경기장으로 출근을 했다. 올림픽 방송은 대회가 열리는 보름 동안 종일방송 체재로 편성됐다. TV든 라디오든 올림픽 방송센터에서 부르면 언제든지 마이크를 잡아야 했다. 기본적인 중계 일정은 나와 있지만 현장 사정에 따라 수시로 변경됐다. 준결승, 결승 경기는 빠짐없이 연결했다. 정규 프로그램 진행 중에도 결승전이 잡히면 메인 스튜디오에서 바로 연락이 온다. 그러니까 중계석에서 모든 경기를 지켜보며 스탠바이를 해야 했고, 유동적인 현장 상황을 방송센터로 알려 기민하게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미국 선수 그레그 루가니스의 금메달 획득 순간을 전국에 알리기도 했다. 루가니스는 플랫폼과 스프링보드에서 금메달을 따 올림픽 다이빙 사상 최초의 2관왕이 된 선수이다. 얼굴도 잘생겼고 인상도 좋았다. 3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순간이 잊히지 않는 것은 나에게 금메달을 두 개씩이나 안겨준 인상 깊었던 경기였기 때문이리라.

올림픽이 막바지로 접어들 때쯤, 아내와 두 아들이 상경했다. 영등포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올림픽주경기장 등 여러 경기장을 돌아가며 구경했다. 사진도 많이 찍었다. 이제 당시의 기억도 많이 희미해졌다. MBC 로고와 올림픽 심벌이 가슴에 선명히 박힌 자주색 중계복의 빛바랜 사진첩만이 그 순간들을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2021년 여름, 올림픽 사상 첫 3관왕, 안산 선수가 아버지의 고향 강진을 찾았다. 밝게 웃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당당하고 멋져 보였다. 그렇게 2020 올림픽도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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