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유생들의 서원 사랑, 현대까지 이어져
강진 유생들의 서원 사랑, 현대까지 이어져
  • 강진신문
  • 승인 2021.07.30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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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옛 이야기 - 서성리 만세길 8]
영당 삼거리(Ⅱ)

 

그 시간 유생들은 감탄하며 선생의 강연을 듣고 있었어. 주자(중국 송나라 유학자)의 적통을 이어받은 송시열의 강연은 웅장했지. 힘찬 물결처럼 거침이 없었어. 유생들은 선생과 문답하며 귀한 시간을 보냈더란다. 겨우 닷새였지만 말이야.

3월 1일, 언제 그랬냐는 듯 물결이 잔잔해졌어. 드디어 선생은 제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단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선생이 인사했어. 강진 유생들도 다투어 인사를 건넸단다.
"부디 건강하소서!"
"강연, 잊지 못할 것입니다."
"어서 해배되기를……." 뱃전에 오른 선생이 손을 들었어.
"선생님……." 유생들은 선생을 실은 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리를 뜨지 못했단다. 마침내 한 점이 되어 사라지자, 포구에 둘러앉아 선생의 안위(편안함과 위태함)를 걱정했어.
"뱃길이 편안하셔야 할 텐데……."
"연세가 많으시니 어찌 견디실지……."

하지만 풍랑을 만나 보길도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지.
"아이고 뱃길마저도 순탄치 않구나."

선생은 보길도에 머무는 동안 이런 시 한편을 남겼더란다.

여든 셋 늙은 몸이
멀고 찬 푸른 바다
한 가운데 있구나.
한 마디 말이 무슨 큰 죄 길래
남녘바다 바람 잦기만 기다리네.

선생의 비통한 심정이 느껴지는 것 같아. 불길함은 부메랑처럼 돌아왔어. 선생이 조정의 호출을 받고 올라가는 중, 기어이 사약을 받았다는 소식 말이야.

"아, 선생님……." 강진 유생들은 국상이라도 난 듯 울부짖었어.

그 인연으로, 정읍 고암(考巖)서원에 모셔져 있던 송시열의 화상을 백련사로 옮겼더란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러 1803년, 드디어 강진의 유생들이 힘을 보태 영당에 남강서원을 세웠단다. 마침내 백련사에서 영당으로 선생의 화상을 모시게 된 거였어. 당호 남강은 주자의 고향이름을 본 딴 거란다.

 

동문(東門)에서 다산선생이 이 소식을 듣고는, "아, 우암을 남강서원으로 모셨구나!"
하고 탄성을 질렀어.

그 즈음 다산 정약용 선생은 천주교 사학(주자학에 반대되거나 위배되는 학문)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긴 유배 살이 중이였거든. 유배 생활의 고초라는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어. 가족에 대한 그리움, 자식의 공부 걱정, 행여 사약이 날아들까하는 두려움에 잠을 설치곤 했지. 애달픈 유배 생활도 벌써 4년째.

"강진 유생들이 기어이 해냈구나! 참으로 훌륭하구나!" 감탄하며 한참을 앉아있었어. 그도 그럴 것이, 그 시절 강진 고을은 흉년에 전염병까지 겹쳐서 황폐했거든. 송시열 선생을 잊지 못하고 십시일반(여럿이 힘을 합하여 도움)으로 사당을 지었다니 감동할 수밖에 없었지.

"강진 사람들은 유독 정이 많고 의리가 깊구나!" 선생은 아전들의 자제들을 더 열심히 거두어 가르쳐야겠다고 결심했단다. 다산은 식은 녹차를 입술에 적시더니 입을 열었어.
"무릇 공부는 세 가지를 명심해야 한다. 바로 정독, 초서, 기록이니라,"
"예, 선생님!"

다산은 말을 이어갔어.
"정독이란 뜻을 새겨가며 자세히 읽는 것을 말하고, 초서란 책의 내용 가운데 중요한 부분만을 뽑아서 쓰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록이라는 것은 후일 남길 목적으로 어떤 사실을 적는 것을 말한다. 알겠느냐?"

"예!" 스승의 말이 길어질수록 학동들의 손은 바빠졌어. 받아쓰고 따라 읽느라 글방에 활기가 넘쳤지. 다산은 강진의 학동에게서 희망을 느꼈단다. 우암 같은 걸출한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고 믿었어. 다산은 저도 모르게 편 손을 꼭 쥐었단다.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 같은 걸출한 인물이 우리 고장과 인연이 깊었다니 정말 대단하지? 역사의 한 가운데 우뚝 서 있는 느낌이야. 다음 이야기도 흥미진진한데 들어주겠니?

1809년의 일이었어. 안문의 노비 돌배가 남당포에서 나무상자를 건졌더란다. 통째로 메고 주인에게 달려갔지. 주인도 심상치 않았는지 단박 흙 마당으로 내려왔어.

"음, 예사롭지 않은 물건이로다. 조심조심 열어보아라."
돌배는 낑낑대며 나무상자에 둘러붙었단다. 행여 부서질까 조심스레 상자를 열었지.
삐…그…덕.

육중한 소리를 내며 상자가 벗겨졌어.
"아니 이건 뭐지?"
상자 안에는 나무인지 갈대인지 모를 것들이 잔뜩 들어있었어. 하나 하나씩 살펴보니 수 십장이 넘는 목판갈필이었어. 주인은 당장 수레에 싣고 관아로 향했단다. 관아에서도 난리가 났어. 현감(조선시대 작은 현의 수령)은 당장 학승과 유생들을 불렀어. 글씨를 대조한 결과 주자경재잠목판(朱子敬齋箴木板)임이 밝혀졌어.

"송시열선생의 영정을 모시는 걸 알고 주자갈필이 떠내려 온 것 같습니다."
마침내 주자갈필 20판과 우왕의 글씨 8판을 모두 전주 감영(관찰사가 직무를 보던 관아)으로 이송하기로 했단다. 현감은 세 필의 말에 목판을 나눠 싣고 부랴부랴 전주로 향했어.

"이랴! 이랴!"
호기롭게 영암 화치(불티재)를 넘을 때였어.
히∼히∼잉∼
잘 가던 말들이 일제히 멈춰 섰어.

"이랴, 이랴!!!"
마부가 아무리 다그쳐도 꿈쩍도 하지 않았지.
"묘한 일이로다."
모진 매질에도 말들은 채찍을 피하지 않고 콧김만 요란이 내쉴 뿐 요지부동이었단다.
"이건 또 무슨 조화인고?"
현감은 그 자리에서 전주 감영에 파발(공문을 급히 보내기 위하여 설치한 역참)을 보내야했단다.

"이건 필시 하늘의 계시인 듯하니. 강진에서 잘 보존하라!"
전주 감영으로부터 명을 받고 세 필의 말은 다시 강진으로 돌아오게 되었어.
맙소사, 잘 가던 말들이 이번에는 강진 영당에 이르러 멈춰 서는 거였어.
"이건 필시 주자갈필을 영당에 모시라는 뜻이 분명하다."
결국 주자갈필을 영당에 모셨단다. 그제야 모든 게 순조로웠단다.

참, 생각나니? 앞장에서 소개한 윤첨의 아들 윤도 말이야, 바로 윤도의 5대손 윤재는 이 소식을 듣고 남강서원으로 달려갔단다.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
"아, 선생님!"

 

윤재는 흙 마당에서 영정을 향해 넙죽 엎드렸단다. 꼿꼿한 우암의 영정을 뵈니, 왠지 목젖이 아프고 코가 매웠어. 다음 날부터 윤재는 노비 무쇠를 데리고 영당에 출입하기 시작했단다. 코가 우뚝하고 어깨가 떡 벌어진 아름다운 청년이었어.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볼 정도로 잘 생겼더란다.

"무쇠야, 너는 마당을 청소하여라."
"네!"
그날부터 무쇠는 마당을, 윤재 도령은 사당을 청소했단다. 안팎을 매일 청소하니 먼지 한 톨 잡초 한 포기 보기 어려웠지. 처음에는 기특하게 여겼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집안에서는 걱정을 했어. 과거 시험에 매진해도 부족할 판에 사당에서만 지내니 기가 막혔겠지.

사실 윤재는 과거시험에는 관심이 없었단다. 수신제가(修身齊家)에만 뜻이 있었던 거지. 장차 서당 훈장이나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소원이었어. 하지만 아버지가 무서워서 속마음을 꽁꽁 숨겨야 했으니 윤재의 마음도 무겁고 괴로웠단다.

봄꽃이 다 떨어지고 무성해진 가지에 새들이 날아들었어.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다가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에 눈이 쌓였지. 그렇게 일년 이년 삼년이 지났어.

윤재는 어떻게 되었을까? 보기 좋게 과거시험에 미끄러지고 말았지. 마침내 집안에서 들고 일어났더란다. 아버지는 단호했어.

"이제부터 남강서원에는 얼씬도 하지 마라!"
"……."
"사내대장부로 태어났으니 가문을 빛내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게 아니냐? 어찌 딴 데 마음을 둔단 말이냐?"
"……."
"이제부터 꼼짝 말고 방안에 틀어박혀 오직 과거시험에 매진하도록 하라!"

그때서야 윤재는 제 속마음을 털어놓았지. 아버지는 노발대발 난리였어. 몇날 며칠을 앓아누웠지만 끝내 자식을 이기지 못했단다.

윤재는 이리하여 이전처럼 지내게 되었어. 매일 남강서원에 나가 쓸고 닦았지.
윤재는 정성껏 영정을 닦고 난 후 반드시 책장을 펼쳤어.
"동에 머물면서 서로 가지 말며, 남에 머물면서 북으로 가지 말라!"
낭랑한 목소리가 매일 담장을 넘었더란다.

윤재가 그토록 쓸고 닦아 빛이 나던 남강서원은 흥선 대원군 시절, 조선팔도를 휩쓴 사원철패 지시로 사라지고 말았단다. 이후 1901년 교촌리로 옮겨져서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지. 꽃피는 남강서원에 들어서면 준수한 도령이 눈에 보이는 듯해. 도포자락 휘날리며 영정의 먼지를 털고 바닥을 박박 문질러대는 윤재 말이야. 민들레가 홀씨가 되어 멀리 씨앗을 날리듯 강진 유생들의 서원 사랑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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