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둥근 밥상
[기고] 둥근 밥상
  • 강진신문
  • 승인 2021.07.30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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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례 _ 주부(칠량면)

젊은 날 즐겨 들었던 영화 '써니' 삽입곡인 JOY의 Touch By Touch를 들으며 청소기를 돌렸다. 정원에서 나무 손질을 하던 남편이 부른다. 내다보니 "그 반바지 뭣 때문에 교환한다고 했지?" 묻는다. 엊그제 새로 산 옷 얘기를 하나 보다. "꼭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바꾸나요? 그냥 맘에 안 들면 반품하고 다른 거로 달라고 하면 되지?"순간 흥을 방해한다는 생각에 퉁명스럽게 내뱉고 말았다. 내 옷을 사면서 디자인이 예쁘고 시원해 보이는 남자 반바지가 있어 충동구매를 한 것이다. 너무 젊은 취향의 디자인을 골랐던 탓일까? 남편은 자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집에 반바지도 많은데 물어보지도 않고 샀다고 타박을 주었다.

마침 읍에 갈 일이 생겨 옷을 바꿔오려고 내게 물은 것이다. 청소기 소리에 내가 답을 안 하니 나를 여러 번 불렀을 수도 있다. 퉁명스러운 대꾸에 남편의 논리정연한 반박이 이어진다. 옳은 얘기이지만 흡사 오래된 축사 환풍기처럼 윙윙 소리로 들린다.

내 안에서도 그간 가라앉혀 두었던 말들이 아욱을 치대면 일어나는 시퍼런 거품처럼 일렁인다. 아무래도 더 있다가는 말다툼만 커질 것 같아 예정에 없던 밭일을 하러 나섰다.

굽은 산길을 돌아가는데 갑작스레 너도밤나무 잎들이 부스럭거린다. 푸른 밤송이들이 달린 가지를 타고 날다람쥐가 오르락거린다. 가던 길을 재촉하려는 찰라 돌부리에 그만 발이 걸려 넘어졌다. 옆에 끼고 가던 바구니가 저만치 내팽개쳐진다. 아침부터 마음을 곱게 먹지 않은 대가인 게 분명하다. 주저앉아 무릎을 보니 낡은 몸빼바지 안으로 선홍색 자국이 퍼진다. 평소 같았으면 집에 가서 연고라도 바를 일이지만 남편의 성난 얼굴이 아른거린다. 얼른 근처 개울물에서 상처를 씻어냈다. 흩어진 것들을 챙겨 올라가니 무성한 풀들이 가득한 산 밭이 눈앞에 보인다. 향이 강해 그나마 산짐승들이 싫어하는 들깨를 심었는데 되려 바라구 풀이 잔치를 벌이고 있다.

분노의 호미질에도 일의 진척이 오르지 않아 호미 대신 낫으로 땅속 바라구 잡초 뿌리를 마구 베어냈다. 비로소 들깨가 밭의 주인으로 자리한다.

고요한 숲에서 짝을 찾는 고라니 울음소리가 골짜기에 가득하다. 시간을 확인하고 산 밭에서 내려왔다. 수돗가에서 장화를 씻는 남편의 모습이 보인다. 얼굴이 수박 속처럼 달아오른 것이 예초기로 논둑을 베고 온 모양이다.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해 애써 남편의 눈길을 외면했다.

냄비에 국수 삶을 물을 올려놓고 새콤하게 익은 열무김치에 매실 액기스와 참기름을 넣고 통깨까지 솔솔 뿌리니 먹음직스럽게 보인다. 거실 한 가운데 둥그런 양은 밥상을 펴놓는다. 남편 앞에는 냉면 사발 그득하게, 내 앞에는 국 사발 고봉으로 열무국수를 담는다. 노동 후 허기에 묵언의 젓가락을 든다.

아뿔싸. 가운데 놓인 열무김치를 집으려는데 자칫 젓가락이 부딪칠 뻔 한다. 우리는 동시에 피식 웃음이 터져버린다. 무더운 여름, 땀 흘린 후에 먹는 맛깔난 비빔국수 때문이었는지 내 자존심의 끈이 순간적으로 풀려버려서였는지 더 커진 웃음이 온 집안에 퍼졌다. 일순, 내 마음의 허기가 채워진다.

원래부터 옳고 그름이 분명한 남편과 틀에 갇혀 있기를 싫어하는 내가 만나서 살다 보니 부딪칠 때가 많다. 문제는 서로의 다름에서 오는 불편함에 종종 짜증을 낼 때가 많다는 데 있다. 마치 심지도 않는데 어김없이 솟아나는 산 밭의 바라구 풀처럼 내 안에도 잡초가 있는 게 분명하다. 산 밭뿐만 아니라 내 마음의 바라구풀을 제거해야 할 터이다. 앞으로도 이 사람과 한 상에 마주 앉을 많은 날을 위해. 위급한 순간에 그이 말고 누가 내 편이 되어주며, 어느 누가 딸아이의 늦은 귀갓길이 염려되어 잠 못 든단 말인가.

부부란 이렇게 살면서 늙어 가나 보다. 부부만큼 편하고 만만한 사이가 또 있을까? 부아가 나더라도 숨 몇 번 내쉬다 보면 측은지심으로 가볍게 넘기는 게 부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우리네 삶이 그렇게 흘러가는 것을 어쩌겠는가? 우리의 부부싸움은 이렇게 싱겁게 끝이 났고 여름의 하루가 그렇게 우리의 기억 속으로 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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