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봉선화연정
[기고] 봉선화연정
  • 강진신문
  • 승인 2021.06.29 10: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점권 _ 전 포스코건설 중국법인장

6월 중순이 되자 집안 담장 밑에 심어놓은 봉선화가 활짝 피었다. 빨강, 하얀, 연분홍, 주홍색의 봉선화가 마음 한 곁을 찡하게 하고 있다.

봉선화는 참으로 아름다운 꽃이다. 작은 키 잎사귀 사이에서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좋아하는 색깔을 한꺼번에 볼 수 있으며, 꽃 모양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앙증스러운 모습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친근하며 정다움을 주고 있다. 봉선화는 왠지 잃어버린 마음속 추억의 그리움을 다시 불러내는 듯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꽃이다.

봉선화는 원래 인도, 동남아시아가 원산지였으나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민족의 한을 노래하는 서정의 꽃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른바 <봉선화> 가곡 때문이었다.

가곡 <봉선화>의 사연을 잠깐 살펴보겠다 (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가곡 <봉선화>를 작사한 김형준은 홍난파 선생과 이웃에서 살았으며 교분이 두터웠다고 하는데, 김형준이 살던 집 울안에는 여름이면 봉선화가 흐드러지게 피었다고 한다. 김형준은 봉선화를 보면서 우리 민족의 처지가 봉선화와 같다고 종종 한탄하였다고 한다.

1920년 홍난파는 <처녀촌>이라는 단편집을 내면서 그 서장에 <애수>라는 제명의 곡보를 실었는데 뒤에 김형준이 가사를 붙임으로써 가곡 <봉선화>가 탄생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노래가 널리 퍼져 만인의 심금을 울리게 된 것은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40년대의 일이라고 한다.

당시 김천애라는 소프라노 가수가 1942년 봄 동경의 히비야 공회당에서 신인 발표회가 있었는데 그녀는 여기서 고향의 어머니가 보내준 치마저고리를 입고 무대에 섰다.

예정된 노래를 마치고 앙코르 곡으로 <봉선화>를 불렀는데 청중석의 교포들이 그녀를 붙들고 울어 흰 치마저고리가 눈물에 젖었다고 한다.

그 후 귀국한 김천애는 일제의 탄압을 받아 가면서도 소복 차림으로 이 노래를 불러 청중의 심금을 울렸고 이 노래는 곧 전국으로 퍼졌으며, 민족의 한을 대변하는 국민 애창곡이 되었다고 한다. 봉선화 사연은 왠지 애틋하다.

꽃의 모습이 주는 사연이 왠지 절절할 것 같은 느낌이다. 시골의 장독대 근처나 대나무 울타리 근처, 도시의 후미진 도로 한 곁에서 소담하게 피어나 보는 이로 하여금 애틋한 옛정을 불러일으키며, 이쁜 꽃 송이 몇 개 따서 손톱에 물들이고, 정다운 임을 생각하는 그 멋, 봉선화 연정이다.

정서적으로는 유행가 현철의 <봉선화 연정>이 가슴에 와닿지만, 오늘은 민족의 가곡 <봉선화> 가사를 실어 보겠다.

울 밑에 선 봉선화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 필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어언간에 여름 가고 가을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 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너 모양이 처량하다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이 예 있나니
화창스러운 봄바람에 환생 키를 바라노라

봉선화의 꽃 말은 '여린 어린아이 같은 마음씨'라고 한다. 봉선화는 연약해 보이고 시골 미인 같은 소박한 아름다움이지만 겨울의 한파를 이겨내고 봄날의 환생을 이뤄내는 의지의 꽃이다.
거의 1년 반 동안의 지루하고도 험난한 코로나와 전쟁으로 지친 우리 마음속에 봉선화 꽃 물처럼 희망의 물길이 스며들길 바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