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우두봉에 오르다
[기고] 우두봉에 오르다
  • 강진신문
  • 승인 2021.06.14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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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례 _ 주부(칠량면)

오랜만에 친한 동생과 산행을 하려고 강진고 약수터로 나갔다. 잘 정돈된 수국 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니 고성저수지 물이 잦은 봄비에 넘실대며 초록빛 나무들의 물그림자가 평화롭다.

저수지 둑을 가로질러 길 초입에 들어서니 아직 사람들의 발길 닿지 않아서인지 풀이 무성하다. 행여 뱀이라도 나타날까 내심 걱정했는데 보이지 않아 다행이다.

저수지 아래에서부터 길을 따라 내 엄마의 마음만큼이나 풍성하고 탐스러운 수국이 눈길을 사로 잡는다. 수국은 한겨울의 추위를 오롯이 견디어 내고는 봄이 다 가도록 땅으로부터 수분과 양분을 빨아올렸을 것이다.

엄마가 고단한 삶의 여정에서도 오 남매를 키워낸 것처럼. 엄마는 유달리 수국을 좋아한다. 수국에서 당신이 지나온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우리 형제들은 그런 엄마의 손길을 수분과 양분 삼아 성장했다. 

수국은 여느 식물들과 달리 꽃의 색깔이 다양하다. 심어진 토양과 물의 성분에 따라 꽃 색깔이 달라진다. 산성도가 강할수록 푸른색이 짙고 알칼리성 농도가 높을수록 보랏빛이나 자주색 꽃으로 피어난다.

토양과 물의 농도가 중성일 때는 대개 흰색 꽃으로 핀다고 한다. 처음에는 연한 자주색이던 것이 하늘색이 되었다가 연한 분홍색이 되어가는 과정은 흡사 연인들의 연애 감정을 표현하는 듯하다.

수국 길을 따라 산길을 한참 올라가니 고성사가 눈앞에 나타난다. 소가 누워 있는 모습과 같다 해서 이름 지어진 우두봉 아래에 자리 잡은 고성사는 소의 목 아래 방울을 다는 부분에 해당하여 사찰 이름을 고성(高聲)이라 지었다 한다.

오랜 시간 속에 새소리 산짐승들의 발자국, 햇볕, 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담아 감싸 안은 것처럼 고즈넉하다. 잠시 바위에 걸터앉아 눈을 지그시 감고 대자연이 뿜어내는 소리와 향기에 자연과 하나 되어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내리막길 길섶에 피어난 키 큰 개망초에 알록달록 나비 한 마리 다가와 수런거리더니 이내 바람 타고 무심한 듯 산골짜기로 날아가 버린다. 철 따라 피고 지는 자연의 무성한 이야기를 가지고 나비는 다시 찾아올 것이다.

호젓한 산길 위로 그늘을 드리운 오랜 세월 산의 품에서 자란 등 굽은 소나무 한 그루, "산은 일순 어둠이 찾아오니 마을로 내려가라"고 말을 건넨다. 길 위로 올라온 소나무 굵은 뿌리 디딤돌 삼아 우리는 안전하게 산에서 내려왔다.

오늘 산행을 함께 한 그녀는 예전에 내가 마음 둘 곳 없어 방황할 때 글쓰기로 복잡한 생각을 풀어내면 어떻겠냐고 권유했었다. 바쁜 일상을 핑계 대며 선뜻 글쓰기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불현듯 찾아온 요양의 시간 앞에서 지나온 삶의 순간들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런 회상은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의 꿈이었던 글쓰기로 연결되었다.

나이가 들어가니 피를 나눈 부모, 형제, 내가 내어줄 수 있던 것보다 그렇지 못한 것들이 많아 노심초사했던 우리 아이들과 힘든 시절을 겪으며 미운 정 고운 정이 든 우직한 남편이 소중하다. 그리고 강진으로 시집와서 만났던 이웃들과 친구들, 오래 보았던 이들을 가까이 두고 싶다.

따스한 햇볕, 맑은 공기, 깨끗한 물 이처럼 일상에서 흔하디흔하게 마음껏 누리는 자연이 없으면 우리는 하루도 살 수가 없다. 생명 유지에 절대적이어서 신은 누구에게나 무한하게 누릴 수 있도록 허락하였나 보다. 가장 쉽게 행복해지는 방법의 하나가 흙을 밟으며 숲길을 무심히 걷는 일이란 걸 뒤늦게 깨달았다.

바쁜 와중에 나를 위해 기꺼이 함께해 준 친구 같은 동생이 있어 고맙다.

바람 불면 바람 부는 대로 비가 오면 커피 한 잔 앞에 두고 빗소리를 듣고 눈이 오면 눈길을 함께 걷고 싶다. 마음이 고운 그녀는 애움길에서 만난 옹달샘 같은 존재이다. 가파른 산행은 아니었지만 걷는 즐거움 있어 행복한 초여름 우두봉 산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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