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역사자원 금릉관 보존되어야 한다
강진 역사자원 금릉관 보존되어야 한다
  • 강진신문
  • 승인 2021.05.24 16: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특집-이재연 학예연구사의 강진 옛이야기] 강진현 객사 금릉관(3)

미래세대를 위한 복원과 현세대를 위한 활용의 조화를 실현하는 일은 문화유산 관리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다. 그 과정의 하나로서 복원의 가능성, 복원 후 활용의 목표와 방향을 설정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강진의 문화재를 복원하는 것에 앞서 강진의 옛것을 알아보고 정확하게 확인하는 것이 먼저의 일이다. 편집자주/

 

1920년 전후 강진객사(금릉관)

 

금릉관(金陵館)은 어디에 있었는가?

강진객사 금릉관의 위치는 어디에 있었는가?. 1872년 제작한 '강진현지도', 구한말 강진현의 객사와 강진경찰서 사진,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지적원도와 당시 지도 등으로 위치를 추정해 봤다.

1872년에 제작된 강진현지도를 보면, 강진현의 치안업무와 죄를 다스렸던 '형방청'은 동헌과 객사 사이에 있었다. 1978년 편찬된 「강진향토지」를 살펴보면, 강진경찰서 본부는 현재의 위치에 개설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경찰서 부지는 일제강점기에 형방청이 그대로 경찰서 건물로 활용되면서 지금의 자리에서 지속적으로 증·개축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23년 6월 13일자 동아일보를 보면, 강진경찰서가 낙성식을 거행했고 총공사비는 13,300원이라는 기사가 나오고, 1955년 4월 9일자 경향신문에는 강진경찰서 신청사로 이전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파괴되어 1955년 경찰서 청사를 개축하였다는 기록이 「강진향토지」에도 있다.

현재의 강진경찰서 건물이 건축되기까지 증개축이 진행되면서 건물의 규모도 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건물부지도 확장되었다. 강진경찰서 부지는 일제가 만든 1915년 지적원도의 면적에 비해 보은산 방향(태양광 주차장) 쪽으로 현재 약 2배 정도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강진객사 금릉관이 사라지면서 객사 앞 부지였던 경찰서는 지속적으로 증·개축되면서 부지와 건물이 확장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그럼 강진객사 금릉관의 위치는 어디에 있었는가? 1920년 전후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사진엽서'중 강진경찰서 사진에는 강진경찰서 입구와 함께 기와집의 작은 건물이 보인다. 초창기 강진경찰서 건물이다. 이 사진을 유심히 살펴보면, 우측 상단에 강진객사 금릉관의 서익헌과 정청의 일부가 보인다. 이 사진 한장으로도 강진객사의 위치는 강진경찰서 뒤편에 있는 태양광 주차장과 해남세무서 사이로 추정할 수 있다.

다른 사진에서도 강진객사 위치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강진객사 뒤편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면 구거(하천보다 규모가 작은 4∼5m 폭의 개울)가 보인다. 이 구거는 현재도 있는 구거이다. 이 단서로 당시의 객사 위치를 추정해 보면 그 규모와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위치는 현재의 경찰서 뒤편과 해남세무서 일부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전까지 현재의 강진군청 자리는 동헌, 강진경찰서 자리는 형방청, 그리고 경찰서 뒤쪽 부지는 금릉관이 있었다. 정밀 발굴조사를 실시해 보면 객사유구의 일부가 확인 될 것이고, 그 유구로 더 정확한 위치를 추정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1954년 항공사진으로 추정하는 금릉관 위치

 

금릉관(金陵館)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는가?

강진현은 조선시대 전라도 56개 고을 가운데 상당히 큰 규모의 고을에 속하였다. 정약용은 『경세유표』의 '군현분등(郡縣分等)'에서 강진현을 호구가 1만 호 이상인 고을로 분류하고, 종6품의 현감이 임명되는 현(縣)이었지만, 규모는 대군(大郡)에 근접한 고을로 분류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 강진현의 규모가 상당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강진현은 1417년 도강군과 강진현을 합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양쪽의 이름을 합하여 강진현을 만들었지만, 조선시대 500여 년을 유지해왔던 지명이다. 현재의 강진군과 완도군를 합한 현으로 전라도 육군의 지휘부 전라병영이 강진현에 있었으며, 정유재란에서 활약했던 이순신이 최후까지 진을 치고 있었던 곳이 강진현의 고금도였을 정도로 상당한 규모의 고을이었다.

그런 강진현의 객사 금릉관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찾아보았다.'조선사진엽서'중 금릉관의 뒷 모습에서 금릉관의 규모를 추정할 수 있었다. 정청을 중심으로 좌·우 익헌의 규모는 기둥과 기둥 사이를 한 칸으로 보고, 정청은 3칸, 동익헌은 7칸, 서익헌은 5칸으로 총15칸으로 추정할 수 있다.

나주 금성관(정청 5칸, 동익헌 6칸, 서익헌 5칸)과 비교해 보면, 금릉관은 정청이 3칸으로 금성관보다 2칸 적고, 동익헌이 7칸으로 한 칸 크고, 서익헌은 5칸으로 금성관과 같다. 나주목 금성관보다는 한 칸 적은 규모지만, 인근 도시에 비해 상당히 큰 규모였다.
강진현의 객사가 큰 이유는 탐라 즉, 지금의 제주도를 가는 나루터였고 길목이었기에 중앙 관리의 출입이 잦았을 것이고, 전라병영이 소재하고 있던 고을이어서 많은 중앙관리들과 손님들이 오고 가는 고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걸맞게 강진현 객사는 인근 고을에 비해 상당히 큰 규모였다.

강진현 객사의 앞모습은 일제강점기에 전면부 모습을 담은 『조선고적도보』를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다. 울산객사 학성관(鶴城館)과 남원객사 용성관(龍城館)은 정청과 좌우익헌이 있는 형태로 강진객사 금릉관과 같은 형식이고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금릉관의 뒷벽이 막혀 있는 것으로 보아 앞 벽도 막아서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시대 객사의 일반적인 배치 형식은 중심영역에 객사와 중문이 배치되고, 그 앞에 외문과 행랑으로 구성된다. 객사는 중앙에 정청이 있고 좌우에 동서익헌이 구성된다. 이러한 건물 외에 누각을 갖는 경우도 있는데, 영월객사의 자규루와 안변객사의 가학루, 밀양객사의 영남루, 성천객사의 십이루 및 강선루 등을 들 수 있다.

객사의 뒤편으로는 인위적으로 조산을 만들어 큰 수목을 심거나 후원을 두기도 하고, 숙소인 익헌 주위에는 연못이나 화초로 조경하여 누각을 설치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건물들의 배치는 마치 궁궐과 같이 정연한 직선 축선 상에 배치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즉 외문과 중문, 정청을 축으로 하여 좌우대칭으로 배치되었다.

강진 객사 또한 이런 형식이였을 것이고, 이와 유사한 객사가 남원객사 용성관(龍城館)으로 추정되며 내삼문(중문)은 남원객사 중문(中門)과 유사하고, 외삼문(외문)은 강릉객사 외문(外門)과 유사할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고적도보』 - 총15권으로 조선총독부의 후원 아래 일본인 학자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다니이 사이이치(谷井濟一)·구리야마 슝이치(栗山俊一) 등이 1915∼1935년의 20년간에 걸쳐 낙랑시대로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고적과 유물들의 도판을 모아 간행한 것

1920년 경 강진경찰서 사진. 뒤편에 객사가 절반정도 보이며 사진은 현재의 수성당 부근에서 찍은 것으로 보인다.

 

핵심 역사문화 자원 금릉관(金陵館)

그 지역의 역사성을 대표하는 가장 핵심은 관아건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객사는 그 지역의 자존심이자 랜드마크 같은 건물이다.

그래서 편액의 명칭이 그 지역의 별호와 같이 활용되었다. 나주의 금성관, 장성의 오산관, 화순의 능성관 등이 마찬가지의 이유로 객사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강진의 객사 또한 도강군의 별호 '금릉'을 사용하여 금릉관이라 했던 것이다.

강진객사 금릉관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 명칭은 과거의 기록들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고, 여러 가지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그 위치와 규모도 찾을 수 있었다. 다행인 것은 강진객사가 건립해 있던 부지에 큰 건물이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발굴조사에서 객사 전체는 아니더라도 그 일부는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현재 강진객사 금릉관이 있었던 부지는 태양광주차장, CCTV관제센터, 해남세무서 및 보은산에 오르는 길 등 다양한 시설들과 연계되어 있다.

그 어떤 것을 행한다는 것은 매우 많은 이해관계 속에서 수 많은 검토와 연구가 필요하고 그 추진이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또한 강진군청사, 강진경찰서의 신축과 연계되어 있는 곳이라 더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금릉관이 있었던 부지와 그 주변을 강진군의 핵심 문화자원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다양한 학술조사와 연구용역, 발굴조사들이 우선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시설의 신축 등 어떤 행위를 행할 경우는 충분한 검토 후에 매우 신중히 접근하는 등 보존과 개발을 함께 이루어내는 지혜가 필요하다.

도시문화의 가치를 확장하는 생명력은 역사문화 자원임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것도 역사문화 자원이다.

강진의 관아와 객사는 우리 지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역사문화 자원이다. 금릉관을 강진의 핵심 역사문화 자원으로 키우는 일은 결코 단기간에 도달할 수 있는 쉬운 목표가 아니며 상당한 시간과 노력, 많은 예산과 인력투자가 요구되는 일이다. 단기적인 안목에서 바라볼 것이 아니라 긴 호흡을 가지고 장기 계획으로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언제가 될지도 모르고, 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나주 금성관처럼 깔끔히 복원된 강진객사 금릉관을 둘러보고 익헌 마루에 앉아 멀리 강진만을 바라보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