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의 객사 금릉관, 어떻게 사라졌는가
강진의 객사 금릉관, 어떻게 사라졌는가
  • 강진신문
  • 승인 2021.05.14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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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이재연 학예연구사의 강진 옛이야기] 강진현 객사 금릉관(2)
좌상 : 강진군청 / 우상 : 강진우편소 / 좌하 : 일본인소학교 / 우하 : 강진경찰서
좌상 : 강진군청 / 우상 : 강진우편소 / 좌하 : 일본인소학교 / 우하 : 강진경찰서

 

미래세대를 위한 복원과 현세대를 위한 활용의 조화를 실현하는 일은 문화유산 관리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다. 그 과정의 하나로서 복원의 가능성, 복원 후 활용의 목표와 방향을 설정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강진의 문화재를 복원하는 것에 앞서 강진의 옛것을 알아보고 정확하게 확인하는 것이 먼저의 일이다. 편집자주/

 

강진현 객사에 대한 기록

강진현의 관아건물들이 있었던 치소는 1417년 도강군과 탐진현이 합하여 강진현이 되었을 당시에는 탐진현의 옛 치소, 현재의 강진군청 자리였던 것으로 보이며, 1429년 도강군 송계리(현, 성전면 수양리 수암마을)로 치소를 잠시 옮겼다가 1475년 또다시 현재의 군청 자리로 치소를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강진현의 관아건물에서 가장 중심이 되고 상징적인 건물인 강진객사, 즉 금릉관에 대한 신축기록은 아직 찾을 수 없었다. 다만 1899년 작성된 『호남읍지』의 公廨(공해) 부분에 '객관은 숭정임오년(1642)에 화재가 발생해 강진현감 여이재(呂爾載, 1600~1665)가 중건하였고, 박미(朴瀰, 1592~1645)의 기문(記文)이 새겨져 있으나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다.'는 기록이 있어 중건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있었다.

公廨 客館  崇禎壬午 遭火 縣監 呂爾載 重建, 有 朴瀰記文字刓 不可考
(공해 객관)  숭정임오 조화 현감 여이재 중건, 유 박미기문자완 불가고

그 현감 여의재에 대한 기록은 『금릉읍지』 선생안(先生案)에 1641년 5월부터 1642년 7월까지 부임했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강진현 객사는 현감 여의재가 재임 중이던 1642년에 객관이 중건(건물 전체를 다시 지음)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박미(朴瀰)라는 문인의 기문이 있었다는 기록에 대해서는 박미가 쓴 문집 『분서집(汾西集)』 권11을 보면 '康津客舍重修記'를 찾을 수 있다. 박미의 행력을 보면 1624년까지 1년간 강진현으로 유배온 부친 박동량(朴東亮)을 따라 강진에 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박미는 그 인연으로 강진현 객사를 중수(큰 규모의 수리) 했던 기록을 기문으로 작성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진객사중수기'의 해제는 추후에 반드시 정리해야 할 것이다.

※ 여이재(呂爾載, 1600~1665) 조선 중기의 문신. 인조 때 이조 ·병조의 좌랑과 정언을 지내고 심기원(沈器遠)이 모반하자 이를 토평하여 영국공신에 책록되었다. 그 뒤 병조참지 ·호조참판·한성부우윤을 거쳐 형조판서에 올랐다.

※ 박미(朴瀰, 1592~1645)는 선조의 딸 정안옹주와 결혼하여 금양위가 되었다. 문집으로 『분서집(汾西集)』이 있다. 특히, 부친 박동량(朴東亮)이 1623년부터 1624년까지 1년간 강진현으로 유배와 위리안치[圍籬安置]되어 있었다.

1954년 항공사진
1954년 항공사진

 

강진의 객사는 어떻게 사라졌는가?

객사(客舍)란 조선시대 지방 읍내에 관아와 함께 한 고을을 구성하는 주된 관청건물 중의 하나로써, 기능적·상징적 중심의 역할을 했던 건물을 뜻한다.

조선시대 행정관청의 필수적인 시설인 만큼 행정단위마다 건립되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근대화과정을 거치는 동안 전국으로 각 지역의 객사들은 그 시설이 변형되거나 철거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간의 장소성 및 역사성마저도 단절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강진객사 금릉관도 마찬가지 과정으로 사라진 것 같다. 2014년 간행된 문사고전연구소의 『강진군 연대표』를 살펴보면 일제강점기 시대의 객사에 대한 기록들이 일부 남아 있다. 1910년 강진현 객사가 일본헌병대 둔소가 되었다는 기록과, 1914년 1월 강진공립보통학교가 객사로 이전되어 수업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조선사진엽서'에서 강진우편소(1910년 12월 개설)와 강진경찰서(1919년 3월 신설)가 있는 사진으로 보아 1919년까지도 객사 건물은 건재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922년 강진현 동헌이 있던 자리에 강진군청(목조와가 117평)이 건립되고, 객사의 주요 위치에 1934년 강진세무서가 개설되면서 객사에 대한 기록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조선시대 임금을 향해 행했던 망궐례 행사 등 객사의 주요 목적과 기능이 사라지면서 일본에 의해 강제로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객사는 각기 다른 시대적 상황 속에서 기능과 구조가 변화하다가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의도적인 해체로 인해 그 기능을 잃고 사라지게 되었다.

나주객사 금성관의 모습
나주객사 금성관의 모습

나주객사 금성관

2019년 10월. 나주 금성관(羅州 錦城館)은 나주객사의 정청으로 보물 제2037호로 지정되었으며, 정면 5칸, 측면 4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금성관은 조선시대 객사 건축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클 뿐 아니라, 팔작지붕을 하고 있어서 일반적인 맞배지붕의 정청과 대비되는 희귀성을 갖는다.

금성관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1487년~1491년까지 나주목사 이유인이 금성관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1617년 나주목사 김개(金鎧)가 중수했다. 1910년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건물 일부를 개조하여 나주군청사로 사용하다가 1976년 완전 해체 복원공사를 진행하였다. 2002년부터 4년간에 걸쳐 나주객사 경내를 정밀 발굴 조사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출입문루인 망화루를 비롯한 중삼문을 복원하였다. 2008년에는 금성관 앞을 가리고 있던 옛 나주군청사를 헐고 동익헌(벽오헌)과 서익헌을 복원하였다.

나주객사는 금성관을 중심으로 동헌, 사창, 향청 등의 관아시설들이 차지하고 있던 곳으로 호남 서남부의 행정 및 군사 중심지였다. 무엇보다 지역성에 주목하여 대표적인 지역 역사문화유산이라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나주 읍치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대표하는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원래 자리를 잘 지키고 있다.

나주 금성관과 관련된 필자의 20년 전의 일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2001년 4월 어느 봄날로 기억한다. 대학원 시절의 건축역사 강의는 현장에서 직접하는 현장 강의가 줄 곳 있었다. 나주 금성관과 도래마을 홍기응, 홍기헌 가옥들을 대상으로 한 수업이었다. 삼삼오오 차를 타고 나주로 향했다. 당시 천득염 교수님과 우리들은 금성관을 둘러보고 시장 안 어느 곰탕집에서 나주곰탕과 깍두기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날의 기억은 맛있었던 점심이 다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학생 신분의 나에게도 너무나 많은 것들을 일깨워 주었다. 당시 금성관은 일반인이나 관광객들이 찾아가는 것조차도 쉽지않는 상황이었다. 옛 나주군청으로 들어가 건물 뒤쪽으로 돌아 들어가야만 금성관의 현판을 겨우 찾을 수 있었고 관리가 안 되고 방치 수준이었다.

고려 성종 2년(983년)에 처음으로 전국에 십이목을 두었는데, 이때 나주는 지방행정의 중심인 목이었다. 나주목은 1895년까지 1000년간 유지됐다. 1000년 동안 지방 주요 도시의 지위를 유지했다. 이런 나주에 일제가 의도적으로 금성관 바로 앞에 나주군청 건물을 지어 버렸다. 그 건물은 약100년 동안 유지하며 호남의 기를 가로막는 역할을 하였다. 마치 조선의 기를 누르기 위해 경복궁 앞에 세운 조선총독부 모습 그대로였다. 어찌 이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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