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의 별호, 금릉(金陵) 언제부터 써왔나
강진의 별호, 금릉(金陵) 언제부터 써왔나
  • 강진신문
  • 승인 2021.05.11 09: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특집-이재연 학예연구사의 강진 옛이야기] 강진현 객사 금릉관(1)
일제강점기 초기에 일본인들이 기념으로 만든 조선사진엽서에 나온 강진군 읍내 전경

 

미래세대를 위한 복원과 현세대를 위한 활용의 조화를 실현하는 일은 문화유산 관리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다. 그 과정의 하나로서 복원의 가능성, 복원 후 활용의 목표와 방향을 설정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강진의 문화재를 복원하는 것에 앞서 강진의 옛것을 알아보고 정확하게 확인하는 것이 먼저의 일이다. 편집자주/

도강군의 별호, 금릉(金陵)

우리나라는 『삼국사기』, 『고려사』 같이 국가차원에서 국가통치목적으로 역사서들이 편찬하였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는 지방행정조직인 군·현 단위에서 독자적으로 역사 지리지들이 편찬된다.
 
사림들이 고을 수령으로 부임하면서 사람 주도 아래 지역의 통치질서를 확립하고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고 자신들의 문화적 주도권을 확립하기 위해 고을의 지리지를 편찬하였다.
 
『금릉읍지』가 일반인에게 처음으로 공개된 것은 2012년 3월이며, 작천면 용정리에 거주하는 박병채옹이 집안에 전해오는 『금릉읍지』를 강진군에 기증하면서 알려졌다.
 
『금릉읍지』에는 다산 정약용이 천자문을 대신하여 만든 '아학편'이 별책으로 묶어져 있다. 『호남읍지』 등 기존 지리지에 수록되어 있던 완도·고금도·신지도 등이 누락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896년 완도군 창설 이후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금릉읍지』가 알려지면서 '금릉'이란 이름이 많은 조명을 받았다. 금릉이란 명칭은 강진에서 많은 곳에서 사용되어왔다. 금릉중학교, 금릉문화제, 금릉팔경, 금릉경포대 등 많이 등장한다. '금릉'이란 지명이 등장한 문헌은 『고려사』이다. 『고려사』 지리, 영암군 에 "도강군은 본래 백제 도무군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양무군으로 고치고 고려 때 다시 '도강군'으로 고쳐서 영암에 소속하였다. 명종2년에 감무를 두었다. 별호는 '금릉'이다"고 되어 있다.
 
1417년 탐진현과 합하여 강진현이 되기 전까지 도강의 별호는 금릉이였던 것이다.

고종 19년(1872년)강진현 지도

 

1899년에 편찬된 『강진군읍지』에 보면 '1417년 두 현을 합쳐 강진현이라 하였고, 도강군의 옛 치소(治所)에는 병영(兵營)을 두었고, 탐진현의 옛 치소에 강진현의 치소를 두었다.'고 되어 있다.
 
도강현은 사라졌지만, 강진군민들은 도강현의 별호인 금릉을 잊지 않고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강진현의 관아
지방 도시에 있어서 역사성을 대표하는 유산은 관아건축이라 할 수 있다. 관아는 조선조 5백년을 지속해 온 건축유형으로 지방 도시의 핵심적 시설이기 때문이다. 특히 객사는 관아의 핵심 건물이며, 가장 대표적인 문화경관으로서 랜드마크의 기능이 있다.
 
1872년 제작한 '강진현지도'를 보면 동문, 남문, 서문이 있는 강진읍성 안에는 별도의 공간으로 구획된 공간이 있는데 客舍(객사)와 東軒(동헌)이다.
 
개별 건물로는 청조루라고도 했던 진해루(鎭海樓), 치안업무와 죄를 다스렸던 형방청(刑房廳), 관아의 주방을 담당했던 관청(官廳), 장교들이 근무했던 장청(將廳), 수령의 비서실 통인청(通引廳), 육방(六房)의 우두머리가 집무하던 이청(吏廳), 병장기를 보관하는 군기고(軍器庫), 조세와 공물을 보관하는 사창(司倉), 백성을 구제하는 진휼청(賑恤倉) 등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동헌은 현재의 군청사 위치이고 군청사 우측 아래에 치안을 담당했던 형방청이 위치해 있는데 현재의 경찰서에 위치라 추정된다. 또한, 각종 창고가 있었던 곳은 지금의 고내에 위치하는 것으로 보아 비교적 비슷한 위치에 그려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사 권 57, 지 권 11, 지리2

가장 위계가 높은 관아건물 객사 
조선시대 관아 중에서도 가장 중심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단연 객사(客使)라고 할 수 있다.
지방 수령이 집무를 하는 공간인 동헌보다 격이 높은 공간이 바로 객사이다. 객관이라고도 했던 객사는 관아를 방문하는 관리나 사신들이 머물던 곳으로서 관아와 관련된 시설들 중에서 서열이 가장 높다.
 
객사 건물은 건물 3동이 합쳐진 경우가 많은데 중앙부에 정청이라고 부르는 건물이 있고, 그 좌·우에 익헌이라고 불리는 길쭉한 형태의 건축물을 연결하는 형태이다. 중앙부 정청은 좌·우 익헌보다 약간 높이가 높게 되어 있다.
 
익헌은 한양에서 내려온 중앙관리들을 머물게 하며 접대하던 건물로 연회와 숙소기능이 가능하도록 넓은 대청마루와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객사의 정청에는 수령이 왕의 지시에 따라 고을을 다스리는 의미에서 궐패(闕牌)를 안치해 두었으며 수령을 비롯한 관원들이 초하루와 보름날 대궐을 바라보며 절하는 향망궐배(向望闕拜)가 이루어지던 곳이다. 이런 이유로 객사는 각 지방에서 가장 경치 좋은 곳에 세워지거나 가장 위계가 높은 곳에 건립된다.
 
몇 년 전 대한제국 또는 일제강점기 초기에 일본인들이 기념으로 만든 '조선사진엽서'를 전문적으로 모아놓은 일본 홈페이지에서 강진현 객사 사진을 비롯한 한말 강진의 사진이 실린 엽서들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객사 뒤편에서 금사봉 방향으로 강진 읍내 전경이 실린 엽서, 강진군청, 강진경찰서, 강진우편소, 일본인소학교를 하나로 모아놓은 엽서, 남포 앞바다와 만덕산이 보이는 엽서, 월출산 양자봉의 전경이 보이는 엽서로 총4장이였다.
 
특히, 100여년 전의 객사 사진이 남아 있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비록 뒤편이지만 비교적 선명하게 잘 남아있어 중요하고 귀한 사진이라고 볼수 있다. 사진을 보면 정청이 높고 좌우 익헌이 낮게 구성된 15칸의 매우 큰 건물이 객사였다. 그 규모가 나주 금성관 못지않다.

강진현 객사, 금릉관(金陵館) 
강진현의 객사를 누가 어떻게 신축했다거나 편액의 글씨를 누가 썼다라는 기록은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최근에 일본의 국립국회도서관홈페이지(https://dl.ndl.go.jp)에서 강진현 객사의 편액 이름을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있었다.
 
'일제 육군참모본부'에서 만든 지리지 『조선지지략(朝鮮地誌略)』 전남도지부 강진현 편에 '관아의 문은 '금릉아문(金陵衙門)'이고 객사는 동북 방향에 '금릉관(金陵館)'이다.'라고 적힌 부분을 찾을 수 있었다.
 
금릉이란 지명은 고려사에서 도강군의 옛 지명이였다. 조선시대 객사의 명칭과 별호로 같이 사용된 경우는 가까이 나주시의 금성관, 장성의 오산관, 화순의 능성관 등 그 예가 많다고 할 수 있다. 강진현의 경우도 금릉이라는 별호를 사용하여 객사의 편액을 '금릉관'이라 걸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식민통치자들의 의도적인 해체와 무관심으로 대부분의 객사처럼 금릉관도 사라지게 되었을 것이다. <계속>

일제 육군참모본부에서 만든 조선지지략 지리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