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때늦은 후회
[다산로] 때늦은 후회
  • 강진신문
  • 승인 2021.05.11 09: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제권 _ 수필가

효(孝)를 백행의 근본이라 했듯이 효는 세상 무엇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소중한 단어다.

일찍이 중국에 자랑스럽게 내세웠던 효자가 많았다. 공자(孔子)의 문하생 중에 효자로 알려진 자하(子夏)는 몸가짐이 너무 엄격했기 때문에 부모를 마주할 때 안색과 태도에 부드러움과 화기(和氣)가 없었다. 이를 지켜본 공자는 그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깊은 애정을 품고 부모 마음을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 부모를 항상 따뜻하고 온유한 얼굴로 마주하라고 충고했다.

춘추전국시대 노래자(老來子)는 칠순 나이에 때때옷을 입고 노모 앞에서 재롱을 부렸다. 나이 칠십 된 아들이 어린애처럼 색동옷을 입고 덩실덩실 춤추는 모습을 지켜보며 노부모는 자신이 늙었다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즐거워했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고생을 많이 하셨다. 전쟁 후 50~60년대 가파른 보릿고개를 넘어 재건운동과 새마을운동으로 경제발전의 불씨를 키웠다. 자유당과 유신독재에 맞서 싸워 민주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맨몸으로 산업정보화의 강을 건너 이제는 IT강국이 되었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풍요로운 대한민국이 될 수 있게 한 고마운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분들의 노고를 폄하하거나 잊어서는 안 된다. 노령자의 존경은 가족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해마다 오월이 되면 아버지가 더욱 그립다. 나의 아버지는 진폐증이란 난치병으로 18년 전에 돌아 가셨다. 일상생활은 물론 음식을 섭취하고 배설하는 것도 힘들어 하셨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재래식 화장실에 쪼그려 앉고 일어서는 일이 너무 힘들다고 하셨다. 나는 앉아서 변을 보실 수 있도록 밑받침에 구멍을 뚫은 의자를 만들어 드리겠다고 대답해 놓고 몇 달 동안 잊고 있었다. 아버지는 지병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하셨고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어릴 적 나는 소문난 개구쟁이였다. 10살 되던 해 나무에서 떨어져 어깨가 세 군데나 골절되었다. 아버지께서 한여름 뙤약볕에 나를 등에 업고 꼬박 한나절 동안 흙먼지 날리는 황톳길을 걸어 접골원을 찾아 치료를 마쳤다. 그런데 나는 그 아버지를 위해 작은 나무의자 하나도 만들어 드리지 못했다. 나는 그때 일을 후회하며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은 그치지 아니하고, 자식은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는 그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부모는 자식들의 효도를 언제까지 기다려 주지 않는다. 한번 돌아가시고 나면 아무것도 해 드릴 수 없다.

오월 나뭇잎이 연녹색 고운 옷으로 갈아입고 싱그러움을 뽐내고 있다. 나의 아버지는 나뭇잎처럼 푸른 시절 가족에게 하얀 쌀밥을 먹이기 위해 돌가루를 밀가루처럼 들이 마신 후 진폐증으로 신음하시다 74세 되던 해 떠나셨다.

나는 부모님 때문에 또 다시 후회하지 않으려고 제35회 요양보호사 국가자격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90세를 앞둔 어머니를 내 손으로 직접 간병해 드리기 위해서다. 낮에는 어머니와 손을 잡고 익숙한 논둑길, 밭둑길 산책도 하고 밤이면 유년시절 가족이야기를 하면서 함께 보낼 날을 생각하면 저절로 힘이 솟는다. 자격시험에 합격하면 자격증을 어머니 침대 위에 걸어 놓고 이렇게 말씀 드리려 한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거동이 불편하게 되면 말썽꾸러기였던 둘째 아들이 어머니 곁으로 달려와 행복하게 모시겠습니다.'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 먹고 멋진 곳 구경 다니면서 오래오래 함께 삽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