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강진 4·4 독립만세운동 102주년 기념식을 맞아
[기고] 강진 4·4 독립만세운동 102주년 기념식을 맞아
  • 강진신문
  • 승인 2021.04.12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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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성 _ 강진고등학교 교장

102년 전인  1919년 4월 4일은 강진읍의 장터에서 전남 지역  최초로 4천여명이란 최대  규모의  군중이 일제에 항거하여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궐기한 날입니다.

그 날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뜻을 기리고, 그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기념식이  강진아트홀에서  강진문화원 주최로  10시 30분에 거행되었습니다.

일요일인데도 독립유공자 유가족과 이승옥 군수님, 위성식 군의장님, 도의원님, 군의원님, 박승기 경찰서장님을 비롯한 각급 기관장님들이 오셔서 그 날의 의미를 되새겼습니다.

원래는 4·4 독립만세운동을 위해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했던 남포마을의 기념공원에서 거행될 예정이었으나, 우천으로 인해  아트홀로 옮겨 다소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강진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은 2차에 거쳐 도모되었습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란 국민의 애송시로 유명한 영랑 김윤식은 당시에 휘문의숙 학생이었습니다. 영랑은 3·1운동으로 학교가 휴학하자 독립선언문 등을  감추고 고향인 강진으로 내려와 이기성, 김안식, 김현봉 등과 모임을 갖고 3월23일로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거사 사흘전인 20일 일본 순사들에게 발각돼 김윤식 등 12명이 체포되면서 1차 만세운동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강진의 애국지사들은  좌절하지 않고 다시 2차 거사를 계획했습니다. 강진의 장날인 4월 4일 정오에 강진읍교회의 종소리에 맞춰 <비둘기바위>에 대형 태극기가 걸리자, 온 군민들은 거리로 나와'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고 합니다. 이 거사를 주도했던 박영옥 열사 등 15명의 열사들이 옥고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강진군민들은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박학조, 차명진, 강주형 선생 등 27명을 추모하기 위해 매년 추모제를 열어왔습니다. 1992년에 기념비를 건립하고, 2005년부터는 범 군민행사로 이어왔습니다.

작년에는 코로나로 인해 독립만세운동이 재현되지 못했지만, 2019년에는 강진고 학생들이 만세운동 재현 행사에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헌화를 하고. 만세 삼창을 하면서  역사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

흔히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을 외쳤던 그 거대한 물결과 우리 민족의 끈질긴 저항과 항거가 밑바탕이 되어, 1945년에 독립을 맞이했습니다.

그로부터 76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일제의 잔재가 청산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미국의 램지어 교수가 위안부 망언을 하자. 우리나라의 대학교수라는 사람들이 지지하는 성명을 보내는 모습을 보면서 아직도 일제강점기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이제는 일본교과서에 버젓히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침략에 대한 반성은 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나라에 시혜를 주었다고 주장하고 있고, 이에 동조하는 세력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철저하게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역사를 바로 세웠다면, 이런 비극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102년 전의 강진읍에 울러펴졌던 '대한독립만세'. 그로 인해 갖은 고초를 당해야했던 애국지사들의 그 숭고한 정신을 계승해야하는 이유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다시는 이 나라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다시는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우기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일본의 음습한 그늘 아래 살아가는 사람이 없도록 하기 위해 그 날의 함성을 영원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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