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구 시인의 쓸쓸한 꿈 어려있는 낙하정
현구 시인의 쓸쓸한 꿈 어려있는 낙하정
  • 강진신문
  • 승인 2021.03.14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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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옛 이야기(강진읍 ②) - 서성리 만세길 4]
이별의 터 낙하정(Ⅱ)

 

최근 강진군도서관이 지역의 숨겨진 역사, 문화를 스토리텔링으로 엮은 두번째 우리 동네 옛이야기를 발간했다. 도서관은 지난 2019년부터 전해져 오는 강진의 수많은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발굴 계승하기 위해 연 1회 연차적으로 우리동네 옛이야기를 발간하고 있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나온 '우리 동네 옛이야기'은 '서성리 만세길' 편으로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6편의 강진읍 서성리와 관련된 전설 같은 우리 역사, 문화 이야기가 정성스럽게 담겨 있다. 이 동화책은 지역의 향토사학자인 양광식 강진문사고전연구소장의 감수를 받아 지역 출신 김옥애, 강현옥, 장미연 동화작가가 직접 쓰고, 지역 출신 김충호 화백이 그림으로 참여했다.


북한 인민군이 강진에 머물게 되자 당연히 강진인민위원회라는 조직도 생기게 됐어. 인민위원회는 대부분 강진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 채워졌지. 그들은 인민군을 도와 공산주의를 싫어한 사람들을 잡아가거나 인민재판을 열기도 했어. 9월 28일. 빼앗긴 서울을 우리 국군이 다시 찾게 됐어. 중앙청에 태극기를 올리고 서울 사람들은 만세를 불렀지. 인민군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갈팡질팡 했어. 남쪽에 머물고 있었던 인민군들은 물러나기 시작했지.

10월 1일. 강진에 와 있던 인민군들도 대부분 빠져 나갔어.
"우리 어서 도망갑시다."
"빨리빨리 서둘러야 하겠소."

인민군이 사라지자 그동안 인민군을 도와줬던 인민위원회 사람들은 함께 떠나질 못해 허둥댔어. 그들은 어디론가 도망갈 시간을 계산하면서 같이 데리고 갈 마을 주민들을 불러 모았지. 도망가려 할 때 그들은 무서운 것이 없었어. 오히려 진짜 인민군보다 더 독한 사람이 돼 있었던 거야.

10월 3일 오후 4시쯤이었지. 지금의 서문회관 바로 뒤편에 그땐 서성리의 마을 회관이 있었거든. 그동안 인민위원회 사람들은 자주 그 마을 회관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곤 했어. 마을 사람들은 나가지 않으면 어떤 보복을 당할까봐 곧 달려가곤 했었단다. 그날도 마을회관으로 모이라는 인민위원회 사람들의 지시가 내려 졌어. 김현구 시인 집은 마을 회관 가까이 있었거든.

그러니 그런 명령을 모른 체 할 수가 없었어. 마침 집에 있었던 현구도 마을회관에 가려고 일어섰지. 마루에 앉아 있던 딸들이 현구를 보면서 물었어.

"아버지, 어디 가요?"
"마을회관으로 나오라 하니까." 딸 명희가 현구에게 말했어.
"가지 말아요."
"왜?"
"우리랑 놀아요."
"모이라고 하니까 갔다 오마."
"아버지 싫어!"
"그래도 얼른 다녀오마."

현구는 머지않아 경찰이 강진에도 들어 올거라 짐작하고 있었어. 조금만 참으면 다시 옛날로 돌아가리라 믿었어. 나오면서 현구는 집 마당에 심어진 단풍나무를 바라봤어. 하루가 다르게 곱게 물들어간 가을 단풍잎들은 현구에게 잘 다녀오라 손짓을 했어. 꽃밭에 자리했던 수선화도 현구에게 알은 체 했지. 봄에 뿜어드린 내 향기를 언제 나 잊지 말아요. 꽃은 봄에 피었다 졌지만 수선화의 향기는 아직도 현구의 코끝에 묻어 있었어. 왜냐하면 현구는 꽃 중에서 수선화를 가장 좋아했거든. 그건 자존심과 고결(성품이 고상하고 맑음)을 뜻 하는 수선화의 꽃말 때문이었어.

현구가 마을회관 앞에 다다르자 그곳엔 오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어. 그 중엔 현구가 아는 사람도 있었고 모르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어. 그때 총을 멘 남자 하나가 부하들을 데리고 사람들 앞에 나타났어. 총을 멘 남자는 인민 위원회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어. 그는 몸집이 크고, 시커멓게 탄 얼굴이었지. 그런데 부하들 중 하나는 현구가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어.

"아니, 자네는?" 현구는 갑자기 몸에 찬바람이 이는 것 같았어. 그는 지난 날 현구의 집안에서 농사일을 도와줬었거든. 그런 그가 붉은 완장(지위를 나타내기 위해 팔에 두른 띠)을 차고 현구 앞에 불쑥 나타난 거야. 총을 멘 남자는 서성리 마을회관 앞에 모인 사람들을 눈으로 한번 쑤욱 훑었어. 그는 현구와 눈이 마주쳤어.

 

현구를 아는지 갑자기 분노에 찬 눈빛으로 쏘아봤지. 그는 손가락으로 현구를 가리켰어. 마침내 붉은 완장을 찬 부하가 사람들 틈으로 들어와 현구의 손을 묶었어.

"이 손 놓아라. 왜 이래?" 놀란 현구가 소리치며 물었어.
"잠자코 따라 와!"
"천서방! 자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는가?" 현구는 도무지 믿어지질 않았었지.
"하하하. 세상이 바뀌었는데. 너는 아직도 내가 천서방으로 보이냐?"

인민위원회 사람들은 자기들이 진짜 인민군인 것처럼 거칠게 말을 쏟았어. 다른 부하들은 현구 외에 두 명의 남자 손을 더 꽁꽁 묶었어.
"자, 여러분들도 모두 낙하정으로 함께 갑시다."
'낙하정이라고? 왜 그곳으로 가는 거지?' 현구는 불길한 예감으로 으스스 몸을 떨었어.

회관 앞에 모여 있던 일반 사람들은 낙하정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어. 그들은 인민군들이 빠져 나갔는지, 경찰이 들어올 건지를 전혀 알지 못했어. 그야말로 깜깜 무소식이었지.

손이 묶인 채 낙하정으로 끌려 간 세 사람은 큰 소나무 아래에 잠시 서 있었어. 소나무 사이로 스며든 가을빛은 현구의 눈을 부시게 만들었 어. 키가 작은 인민위원 하나가 다가와서 장소를 정리했어.

"자, 자 모두들 자리에 앉아 봅시다." 함께 따라 온 많은 사람들은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 불안한 얼굴 들을 했지. 얼른 자리에 앉으면서 긴장된 표정으로 다음 순서를 기다렸어.

"잠시 후에 인민재판이 열릴 겁니다."사람들은 앉아서 귀를 기울였어. 붉은 완장을 두른 천 서방이 현구를 비롯해 세 사람을 끌고 나타났어. 우렁찬 그의 목소리가 메아리를 만들면서 퍼져 나갔었지.

"지금부터 인민재판을 시작합니다."
갑자기 생겨난 일이라 현구는 얼떨떨할 뿐이었어. 내가 왜 인민재판을 받아야하지? 뭘 잘못해서 이곳으로 끌려 왔지?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는데. 잘못한 일이 있어야 재판을 받을 게 아닌가? 나는 여태 한 평생 살면서 나쁜 짓 한 번 한 적 없는데 왜 내가 여기 온 거야? 여러 사람 앞에서 진행될 인민재판을 현구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현구는 억울하고 또 억울했지. 하지만 누구에게 하소연을 할 어떤 힘도 없었던 거야. 인민재판을 끌어가는 천서방의 목소리가 계속 됐어.

"여러분!" 그는 어깨에 두른 붉은 띠를 한번 고쳐 멨어. 
"예."
"여기 이 사람을 똑똑히 보십시오."
"예." 첫 번째로 현구가 재판을 받았어. 소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똑같은 목소리로 예, 예. 대답만 했어.

"이자는 읍사무소에서 우리 인민들의 피를 빨았소."
"뭐라. 피?" "오메 그랬어? 우리들의 피를 빨고 살았구먼." 모여 있는 사람들은 믿기지 않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어.

현구는 한마디 변명도 할 수가 없었어. 현구가 읍사무소에서 했던 일은 세금을 받는 거였거든. 일만 꼬박꼬박 성실히 해 왔는데 피를 빨고 살았다니. 그는 현구가 세금을 받아서 나쁜 짓을 한 것처럼 몰아갔어. 세금이 어디 개인적으로 받아 쓸 수 있는 돈인가. 세금을 받아서 나라에 돌려주는 일만 했는데 억지 거짓말로 죄를 만들어 씌운 거였어.

"여러분, 이 사람을 어떻게 할까요?"
"..........."
"이런 나쁜 놈을 어떻게 처리 할까요?" 여기저기서 귓속말로 수군수군 했어. 누군가가 크게 말했어.
"당장 죽여야지라우."
"옳소."
"죽이는 게 당연합니다." 또 옳소 소리가 터져 나왔어.
"그럼 이 못된 짓을 한 자는 사형이오." 인민위원회 사람들이 먼저 박수를 보이자 여기저기서 박수소리가 들려왔어.

다음 사람의 재판이 다시 시작됐어. 현구는 천 서방에게 붙들린 채 끌려갔어. 낙하정의 구석진 곳 (지금의 강진고등학교 자리)으로 가서 무릎을 꿇었어. 그의 얼굴 표정은 물처럼 담담하게 편 안했어. 천서방은 현구를 몇 번 발로 찬 후 어디선가 몽둥이를 들고 왔어. 그리고는 현구의 머리를 내리친 거야. 뒷머리를 얻어맞은 현구는 '악' 비명을 쏟았어. 그 자리에서 그만 숨이 끊기고 말았단다.

우리 고을 서문 밖 새 동산 모롱이(모퉁이)에 쓸쓸한 꿈 어려 있는 이별의 터 낙하정 ........
현구는 '낙하정'을 이별의 터라 노래하며 시를 남겼지. 그가 썼던 시처럼 그곳에서 세상과 마지막 이별을 한 거야. 정말 놀랍지 않을 수 없어. 그런데 현구가 세상을 떠난 후에 조그만 일이 생겨났어. 강진 사람들은 현구가 쓴 시의 제목 '낙화정'을 '낙하정'으로 바로 잡아야 된다는 거였어.

그가 쓴 시의 제목을 가지고 저마다 의견들을 내놓았지. "'낙화정'을 '낙하정'으로 바꿔야 합니다."

"아니오. 낙화정이 맞을게요."
"바꿔야 하오." 서로 근거를 대가며 그들은 자기의 주장들을 굽히지 않았어.
"그러지 말고 강진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분들에게 판단을 내려 주라고 하지요."
"그럼 그렇게 합시다." 마침내 강진역사를 공부하신 분들은 여러 가지 근거를 내보이며 '낙화정'이 아니고 '낙하정'이 옳다고 결론을 내렸어.

낙하정에 세워져 있는 김해김씨 비문에 낙하정 (낮게 깔린 저녁노을)이라 기록되어 있다는 거야. 그게 바로 근거가 된 거였어. 지금은 김현구가 쓴 시의 제목을 '낙화정'이 아니고 '낙하정'으로 고쳐 부르고 있어. 그리고 낙하정 부근에 임시로 묻혀 있었던 현구는 그 후 자식들에 의해 다른 곳으로 옮겨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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