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없이 자식들을 사랑했던 현구 시인
한 없이 자식들을 사랑했던 현구 시인
  • 강진신문
  • 승인 2021.03.01 18: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동네 옛 이야기(강진읍 ②) - 서성리 만세길 3]
이별의 터 낙하정(Ⅰ)

 

최근 강진군도서관이 지역의 숨겨진 역사, 문화를 스토리텔링으로 엮은 두번째 우리 동네 옛이야기를 발간했다. 도서관은 지난 2019년부터 전해져 오는 강진의 수많은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발굴 계승하기 위해 연 1회 연차적으로 우리동네 옛이야기를 발간하고 있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나온 '우리 동네 옛이야기'은 '서성리 만세길' 편으로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6편의 강진읍 서성리와 관련된 전설 같은 우리 역사, 문화 이야기가 정성스럽게 담겨 있다. 이 동화책은 지역의 향토사학자인 양광식 강진문사고전연구소장의 감수를 받아 지역 출신 김옥애, 강현옥, 장미연 동화작가가 직접 쓰고, 지역 출신 김충호 화백이 그림으로 참여했다.


"문배 이리 와봐라" 현구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자식들이 자랑스럽고 뿌듯했어.
"왜요?"
"애비하고 팔씨름 한번 해 보게."
큰아들 원배는 그저 웃으며 그 장면을 지켜봤어. 아버지는 원배보다 둘째인 문배와 팔씨름을 자주했어.

"좋아요. 제가 아버지를 이기면 어쩔래요?" 자신 있게 문배가 물었어.
"이기면 네가 원하는 것 한 가지 들어 줄게."
아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일지 현구는 미리 알고 있었어. 둘은 낮은 밥상 앞에 서로 마주보고 앉았어. 오른손을 내밀며 꼭 다문 입술에 힘을 줬지. 처음 시작할 땐 붙잡은 손목이 서로 팽팽하게 떨리었어.

한참을 버티었지. 그러다 시간이 흐르자 문배의 손은 현구의 손을 상 바닥 위로 눕히고 말았어.
"이겼다!"
"애비가 졌구나." 문배는 좋아서 어찌할 바를 몰랐어.
"아버지, 이제 제 소원을 들어 주셔요."
"알았다. 또 목말 태워달라고?"
"당연하지요."
"허허."

현구는 그저 좋아서 아들 문배 앞으로 등을 내밀었어. 문배는 현구의 어깨 위에 두 다리를 벌리고 올라탔지. 이랴 차차~ 이랴 차차차~ 아버지 현구는 말이 되고 아들 문배는 말을 탄 사람이 되어 둘은 방을 한 바퀴씩 돌곤 했어.

현구는 1904년 서성리 179번지에서 태어났어. 모란의 시인 영랑과 함께 강진공립보통학교(현 중앙초등학교)를 다녔대. 보통학교 졸업 후엔 서울로 가서 배재 학당을 다니다 그만뒀어. 그리고는 훌쩍 강진으로 내려왔단다. 그 이유는 모르지만 그때부터 시를 혼자 쓰고 고독감에 빠져들었대.

서성리에서 살았지만 현구는 자주 탑동 영랑의 집 뒷담 길을 돌아 보은산 선인봉에 올라갔어. 가다가 비둘기 바위에 눕기도 했지. 흰 구름과 하늘과 하나가 되어 명상의 시간을 많이 갖곤 했어.

1930년 5월엔 영랑의 추천으로 <시문학 2호>잡지에 <임이여 강 물이 몹시도 퍼렇습니다>등 4편의 시를 발표했어. 그 후로도 <문예 월간> <문학>같은 잡지에 열 두 편의 시를 발표하다가 1934년 후로는 시 발표를 중단했어.

현구는 시 발표는 안 했지만 서성리 집에서 조용히 시를 쓰며 살아 간 게야. 쓴 시를 차곡차곡 모아가면서 훗날 시집으로 묶어 낼 시간을 기다렸지.

그는 스물다섯에 결혼을 해서 아들, 딸, 딸, 딸, 아들, 아들, 딸, 딸, 딸. 이렇게 아들 셋, 딸 여섯을 낳았대. 아홉 명의 자식들을 볼 때마 다 현구는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무겁게 느꼈겠지.

그래서 강진읍사무소(지금의 강진군청)에서 청백하고 성실하게 일을 하면서 자식들을 자상하게 돌보았어. 틈틈이 시를 쓰면서도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는 따뜻하고 자상한 아버지였지.

하늘이 청자 빛처럼 파란 가을이었어. 들판엔 벼가 고개를 숙이며 익어 갔지. 현구는 넷째 딸을 데리고 바람을 쏘이러 나갔어. 문배에 겐 목말을 태워 줬듯이 딸아이와는 가을 들판을 거닐었지.

그는 서성리 들판 끝에 보인 낮은 산을 가리키면서 딸에게 말했어.
"명희야, 아버지랑 저기까지 올라가 볼까?"
"어디?"
"큰 소나무들이 서 있는 곳."

현구는 혼자서도 늘 집 앞의 낮은 산인 낙하정에 오르곤 했어. 그 때마다 푸르고 우람한 소나무들을 바라보았어. 절로 기분이 상쾌해 지곤 했지.
낙하정이 가까이 있으니 허물없고 친하게 느껴졌던 거야. 소나무 동산에 오른 현구와 딸 명희는 맑은 공기를 실컷 마시며 가슴을 폈어.

그때 현구가 왼쪽 바지 호주머니에서 종이와 연필을 꺼냈어.
"아버지, 뭐해요?" 명희가 물었어.
현구는 대답 대신 묵묵히 몇 자 적어 나갔어. '낙하정'에 대해 떠오 른 생각들이 도망가지 않게 얼른 기록을 해둔 거야.

"가서 저녁에 다듬어야지."
"시를요?"
어린 딸도 아버지가 하는 일을 짐작했어.
"맞아. 오늘은 '낙하정' 시를 쓸 거야."
"어떻게 써요?"
"지금 말해도 너는 몰라."
"피~" 토라지듯 명희는 입술을 앞으로 뾰족 내밀었어.

낙하정은 광주와 목포 쪽으로 오고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어. 떠나가고 들어오는 자동차들과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는 낙하정은 강진의 관문(지나가는데 거쳐야 할 문)이기도 해.

강진 사람들은 이 낮은 산을 '버버리까끔'이라고도 불렀어. 지금은 거의 아름다운 솔밭 동산을 '낙하정'이라 부르지만. 낙하정에 심어진 소나무들은 언제나 그림처럼 아름다웠어.

그것은 만덕산의 안개가 내려와 이곳 오래된 소나무에 걸려 있기 때문 이래. 만덕산도 우리 강진에 있는 산이거든. 강진 남쪽 끝에 우뚝 솟아 있는 산. 그 산엔 기이한 돌과 바위가 많아. 동백나무와 비자나무, 박달나무, 후박나무들이 산등성이를 뒤덮고 있었고. 계곡 사이를 흐르는 물소리와 안개는 신선들의 놀이터처럼 느껴 졌어.

 

이런 만덕산의 안개가 낙하정까지 닿아서 정자처럼 시원한 그 늘을 만들어 준다는 거야. 그러므로 아이들도 어른도 이 낮은 동산 의 소나무 아래에선 늘 푸른 꿈을 꿀 수 있었던 것 같아.

딸을 데리고 낙하정을 다녀왔던 날 밤 현구는 호롱불을 켜고 책상 앞에 앉았어. 언제나 그랬듯이 이 세상에서 자기는 혼자라는 고독감이 스며들었어. 여럿 자식들을 생각하면 가난이 한스러워졌지. 웃고 도 싶고 울고도 싶어졌어. 막걸리 한 사발 들이켜고 싶은 마음으로 현구는 시를 써 내려갔어.

낙하정
우리 고을 서문 밖 새 동산 모롱이(모퉁이)에
쓸쓸한 꿈 어려 있는 이별의 터 낙하정

임 두고 고향 두고 타관 길 외론 마음
잘 가라 잘 있거라 서뤄 눈물짓는 꿈

아아 굽어진 노송나무 바람이 울면
서러운 옛 이야기 속살대느니

보내는 이 가는 이가 이 길에 서서
눈물 흘리는 낙하정 낙하정.

쓰고 나서 현구는 시를 읽어 봤어. 또 한 번 읽었어. 자신의 마음이 찡해졌어. 어쩌자고 이렇게 슬픈 시가 써졌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거야. 그냥 낙하정에서 누군가와 이별하는 장면이 떠 올랐어.

잘 가라 잘 있어라 하며 손을 흔드는 모습도 눈앞에서 아른거렸고. 혼자 묻기도 했어. 나는 왜 낙하정을 이 별의 터라 했지? 왜 낙하정을 서러워 눈물짓는다 했을까? 물어보고 대답을 해 보았지만 그 답은 찾질 못했어.

현구는 이렇게 쓴 시들을 차곡차곡 모아가면서 하루하루 생활을 해나갔어.
1950년은 현구의 나이 46세였어. 그 해에 6.25 한국전쟁이 일어 난 거야. 소련의 도움으로 군사력을 키운 북한은 삼팔선 곳곳에서 남쪽으로 밀고 내려왔어. 국군은 북한의 무기와 병력을 이기지 못하고 불과 사흘 만에 서울을 빼앗겨 버렸지. 국군은 한 달 만에 낙동강 부근까지 물러나게 되었어. 8월엔 강진에도 인민군 (공산주의 국가에서 부르는 군대 이름)이 들어 왔어.

인민군들은 강진에서 대밭으로 둘러싸인 집들을 찾아 들 었지. 그들은 마당이 있는 집의 살구나무에 고기도 걸어 놓기도 하고 마루에 앉아 자기네들끼리 웃으며 이야기도 나누었어. 집 주인의 아이들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기도 했고. 그런 걸 보면 인민군이 모두 나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아.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