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워낭소리 신작로에서 들리고
[다산로] 워낭소리 신작로에서 들리고
  • 강진신문
  • 승인 2021.02.01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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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헌 _ 시인·수필가

강진 우두봉 아래 산골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늘 부러웠던 것이 있었다. 학교 수업을 끝낸 반 친구들이 가방을 둘러메고 삼삼오오 담임선생님 댁으로 과외를 받으러 가는 걸 멀찍이서 늘 지켜보곤 했으니 말이다.

한여름 잘사는 집 아이들이 소고삐를 길게 잡고 나무 그늘에 앉아 책 읽는 모습 또한 부러움이었다.

동네 애들이 야트막한 야산에서 소 뜯기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낼 때 난 농약 냄새 풍기는 논두렁을 오가며 꼴을 벴고, 친구들이 과외 받으러 갈 때 가방 대신 책보자기를 허리에 두르고 십 리 길 논둑과 신작로를 달려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숨이 헉헉 막히는 지루한 뙤약볕 길에서 갈색 메뚜기 팥중이를 만나는 날은 그나마 운이 좋은 날이었다. 콩중이 팥중이가 앞서가며 길을 안내해줬으니까 말이다.

다가서면 멀어지고, 달려가면 저만치 도망가는 팥중이. 유년의 첫사랑처럼 닿을 듯 닿을 듯이 애를 태우는 팥중이를 쫓다 보면 어느새 동구에 닿곤 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땡볕 길을 홀로 걷기란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어쩌다 신작로에서 길동무로 소달구지를 만나는 날은 행운이었다. 소달구지 뒤를 쫄쫄 따라가는 재미가 쏠쏠했고, 주인 몰래 달구지 뒤쪽에 달랑달랑 타고 가다 주인이 돌아볼라치면 혼비백산 뛰어내려 멀찌감치 도망갔던 일도 추억으로 남았다.

누런 소가 끄는 달구지는 말구루하고는 달랐다. 말구루마는 대체로 바삐 달린다.  말 자체도 무섭다. 앞발을 높이 쳐들고 우는 모습도 그렇지만 한 번씩 좌우로 머리를 흔들며 큰소리를 낼 때는 뭔가 언짢아 화를 내는 것 같아 두렵기까지 하다.

소와 말은 눈빛도 다르다. 촉촉이 젖은 소의 커다란 눈동자가 순수와 슬픔, 그리움을 품고 있다면 말은 야성적이고 도전적인 눈빛을 갖고 있다. 요란하게 말발굽 소리를 흘리며 달리는 말구루마는 따라가기조차 숨이 찼지만 소달구지는 여유가 있어 좋았다. 친근감 때문인지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한번은 통 크게 친구들과 소달구지에 올라탄 적이 있었다. 달구지 주인은 우리가 뒤에 탄 걸 알고 '이놈들 혼 좀 나 봐라.' 하는 생각이었는지 소고삐를 바짝 조이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워낭이 요란하게 울어 댔다. 한참을 달리던 아저씨가 뒤돌아보며 "누구 허락받고 탄 거야?" 하며 소리쳤다.

달구지 위에서 덜컹거리는 재미를 느끼기도 전에 당한 급습이었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친구들은 도망갔지만 나는 달리는 달구지에서 뛰어내릴 용기조차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경험한 탈 것이라고는 한겨울 꽁꽁 언 무논에서 탄 썰매뿐일 정도로 촌뜨기였으니까 말이다. 하늘은 노랗고 땅은 빙글빙글 돌고 온통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달구지 속도가 점차 줄고, 아저씨가 뒤돌아보며 씽긋 웃었다. 아무렇게나 자란 수염,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 인상이 조금 무서운 아저씨를 보며, 나는 '이제 꼼짝없이 죽는구나.' 생각했다. 한데 아저씨는 "많이 놀랐지? 걱정 마. 함께 타고 가자." 하셨다.

아, 그 순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눈물이 핑 돌았다.

그날 이후 그 달구지 아저씨를 만난 적은 없다. 샛골 가는 길도 많이 변했다. 집들이 들어서고 신풍리로 이어지는 큰길 공사도 한창 진행 중이다. 그러나 신작로에서 들었던 그 워낭소리는 아저씨의 정감 어린 음성과 함께 오래도록 내 가슴을 적셨다.

영혼을 울리는 듯한 낭랑한 소리, 그때 그 시절 샛골 가는 길의 소달구지 워낭소리가 한없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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