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새해 아침에
[다산로] 새해 아침에
  • 강진신문
  • 승인 2021.01.15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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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 _ 수필가

새해 아침에 들길을 걷는다. 작년 한 해 동안 거의 매일 걸었던 길이다. 정확히는 모내기를 한 후 수확을 할 때까지의 기간, 즉 6월부터 10월까지 약 5개월간이다.

농사를 짓는 사람은 다 그럴 테지만 모내기를 하고 난 후에는 그냥 있을 수가 없다. 이앙 다음날부터 어린모가 침수는 되지 않았는지, 병충해가 생기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물 관리 등 -. 

마치 어린 자식 키우는 것 같다. 그러므로 거의 매일을 가서 살피는 것이다.물을 넣어 줄때는 하루에 두 번도 간다. 자칫 어린모가 물에 잠기기 때문이다. 거리는 집으로부터 3.2km. 걸음걸이로는 5.000보 정도다. 물고를 그리고 벼들을 살펴 본 후 가벼운 도수체조와 팔굽혀펴기 등 몇 가지 운동을 한다. 논가의 조그만 빈터에서다.

그리고 발길을 돌린다. 집에 돌아오면 1만보 안팎이다. 적당하다. 운동과 논농사를 병행한 그런 일상이 계속된다. 그러다가 수확이 끝난 후 부터는 그 걷는 길이 달라진다. 들길이 아닌 산길 등산로이다.

그런데 오늘은 어제까지 걷던 등산로가 아니고 지난해 농사를 지으면서 다니던 들길을 따라 걷고 있는 것이다. 무슨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그냥 매일 다니는 코스를 벗어나 지난여름 하루도 빼지 않고 다녔던 그 길이 조금은 그리워서(?)일 것이다.

오늘따라 찬바람이 마치 칼날처럼 양 볼을 훑는다. 며칠 전 까지만 해도 겨울답지 않는 바람이 눅눅하게 불었었는데 갑자기 몰아닥친 추위다. 집을 나서면서 조금 뛰었더니 두텁게 껴입은 옷 속으로 약간의 땀이 흐른다. 그러나 등허리로 스며드는 찬바람은 상쾌하다.

들길이 끝나고 내 논의 논둑길로 들어선다. 논두렁 풀이 누렇게 말라 겨울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지난여름 그토록 무성하게 자라던 풀들이다. 메말라 금이 벌어진 논바닥은 벼 그루터기만 남아 쓸쓸하다. 다른 논처럼 녹비나 사료작물을 심을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논 1,670평, 그리고 밭 560평. 내가 소유하여 직접 경작하고 있는 땅이다. 가난한 도시생활 속에서도 팔지 않았었다. 남들은 시골의 땅이나 집을 처분하여 아파트 평수를 늘리는 등 소위 재테크라는 것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걸 할 줄 몰랐는지 안했었는지 그냥 보냈다.

게으르고 우직한 성격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이악스럽기 까지 하는 아내마저 그것들을 팔자는 데는 고개를 저었다. 부모 유래답(遺來畓)이라는 변(辯)이었다. 그런 우리를 친구들은 이상하게 바라봤다. 시골의 집과 땅을 그대로 두고 있는 나를 면전에서 냉소도 했다. 늙어서 농사지을 거냐고-.

정년을 한 후 시골로 돌아왔다. 그리고 친구들 말대로 농사를 지었다. 남들은 귀농 자금을 받니 어쩌니 했지만 그런 것 또한 외면했다. 처음에 나는 농사를 짓지 말자고 했었다. 그러나 집사람은 아니었다. 결국 아내를 못 이겨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몇 년이 되었다. 작년에도 추수를 했다. 40kg 들이 포대로 약 80여 가마였다. 일조량이 적어 평년보다 10여 가마가 덜 나왔지만 그래도 흡족했다. 그 중 40가마를 농협수매 하고 그리고 나머지 40여 가마를 한꺼번에 찧었다.

방앗간에서 하얗게 도정된 쌀을 집 안마당까지 실어다 주었다. 20kg 들이 60가마이다.

작년에 기록한 메모지를 들추었다. 매년 추수를 하여 몇몇 지인들에게 보냈는데 그 명단이다. 나와 우리 아이들이 1년 동안 먹을 30가마를 제외 하고 나머지 30 가마를 그들에게 부쳤다. 가격으로 치면 얼마 되지 않고 그야말로 하찮다. 그러나 그것은 내 땀이 배인 그리고 친환경 유기농으로 직접 지은 쌀이다. 그래서 주는 내 마음도 뿌듯하다. 보낼 때 마다 친구들에게 "햅쌀인데 그게 쌀이 아니고 내 마음이다" 라고 했다.

겨울바람은 산위에서 부는 것과 들에서 부는 바람이 서로 다르다. 또 여름이 오면 들바람 불어오는 이 길을 열심히 오가리라. 그리고 건강을 다지고 또 한해의 농사를 지으리라. 풀어헤친 옷깃을 다시 여미며 찬바람이 휘몰아가는 빈 논을 뒤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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