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내 인생에서 가장 아팠던 시간
[기고] 내 인생에서 가장 아팠던 시간
  • 강진신문
  • 승인 2020.12.28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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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향 _ 강진군민자치대학 독서대학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을 꿈꾼다. 잔잔한 물결 위에서 순항하는 돛단배처럼 평온한 삶을 향해노를 저어간다. 하지만 삶이라는 것이 원하는 방향으로 아름답게만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느닷없이 벼랑 끝에 서게 되기도 하고 가끔은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지난 겨울일이다. 덤불 사이에 분홍 슬리퍼 한 짝이 며칠 째 방치된 채 버려져 있었다. 그 쪽을 지날 때마다 자꾸 슬리퍼에 눈길이 가면서 오래전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슬리퍼 한 짝을 보며 연상 작용을 하고 소설을 쓰듯 온갖 상상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도대체 슬리퍼 주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꼬리를 물면서 오래 전의 일이 떠올랐다.

1990년 12월, 나는 그때 광주에 살고 있었고 다음해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막냇동생의 대입 예비소집이 있던 시기여서 동생이 자취방에 올라와 있었는데 아침을 먹고 난 후 전화벨이 울렸다. 벨이 울리는 순간 이상하게 불길한 예감이 확 스쳐갔다. 그리고 그 예감은 맞아 떨어졌다. 엄마가 조금 다쳤으니 빨리 집으로 오라는 집안 삼촌의 전화였다.

혼자 버스를 타고 강진 집으로 오는 동안 뱃멀미의 메스꺼움처럼 속이 울렁거리고 계속해서 심장이 쿵쾅거렸다.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동네 입구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고 그들은 나를 보는 순간 일제히 울음을 쏟아냈다. 집에 들렀다가 할머니를 보고 누군가를 따라 장흥병원으로 향했다. 영안실에서 엄마의 죽음을 확인한 순간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급하게 준비한 것으로 보이는 엄마의 흑백 영정사진, 마흔 네 살 엄마는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스물 네 살의 나는 그 사진을 보며 미친 듯이 울었다. 아버지는 충격으로 몸을 가누지 못해 병원에 입원을 하였고 우리 형제들은 한없는 허탈감에 빠져들었다.

엄마는 승합차를 타고 동네 사람 결혼식에 가던 길이었다. 운전자는 결혼을 하는 신부의 오빠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무면허 운전자였다. 차가 동네를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중앙선을 넘어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졌다고 했다. 운전 미숙으로 인한 교통사고였다. 그 때 승합차에 타고 있던 사람 중 네 명이 한꺼번에 사망한 대형 사고였다. 일요일이라 응급처치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엄마는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 결국은 죽음을 맞이했다. 동네가 쑥대밭이 되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들은 기가 막히고 참담했다.

졸업 후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해 광주를 떠나 집으로 왔고 집 근처에 있는 직장을 다니게 되었다. 아버지가 근무하시는 곳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버거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물론 할머니도 계셨고 아버지도 계셨지만 느닷없이 찾아온 엄마의 부재는 스물 네 살의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것이었다. 엄마의 공백을 메꿀 수 있는 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었다. 친구처럼 기대고 살았던 엄마가 떠나자 갑자기 의지할 곳이 없어졌다. 모든 것이 공허했고 내 시간들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갑자기 내려앉았다.

치운다고 치운 엄마의 흔적은 여기저기서 발견이 되었다. 옷을 정리하고 소지품들을 모두 없앴지만 뜬금없는 곳에서 엄마 옷가지들이 발견될 때마다 산발한 여자처럼 마음이 헝클어졌다. 그것들은 엄마의 끄나풀처럼 내 뒤를 따라다녔고 나를 자극하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엄마가 꾸려온 장손 집안의 큰살림이 나에게 넘어왔다. 나에겐 버거운 짐이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해야 하는 부재에 대한 책임감과 일 년에 몇 번씩 지내야 하는 제사, 그리고 직장생활까지 힘든 나날들이 이어졌다. 날마다 작은 엄마가 집을 오가며 살림을 도와주었지만 육체적 노동보다 정신적인 아픔을 견뎌내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몇 년 동안은 꿈속에서 늘 엄마가 나타났다. 다리가 아프다고도 했고 나무에 기대서서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기도 했다. 친척들도 꿈에 엄마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그런 말들이 부담스럽고 듣기 싫었다. 존재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부질없는 이야기들이 나를 아프게 만들었던 것 같다.

덤불 속 분홍 슬리퍼를 보며 엄마가 신었던 와인색 단화를 생각했다. 죽음의 현장에 제 멋대로 던져진 신발. 다급했던 상황의 암시였거나 도피였을 분홍 슬리퍼처럼 엄마의 신발도 나에겐 그런 의미였다. 잊혀 진 듯 하다가 잠깐씩 되살아나는 악몽 같은. 

누구나 화려하고 멋진 꽃길만을 걸을 수는 없다. 돌부리에 치이고 가시덤불에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다. 결국 행복은 불행을 견뎌내는 것이라고 스스로 결론을 내려 본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순리대로 흘러가는 것이며 사람들은 그 순리 안에서 인생의 방향을 잡고 흔들리며 가야 하는 것이라고.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도 그러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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