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전통 제다법 강진 사람들에게 이어졌다"
"다산의 전통 제다법 강진 사람들에게 이어졌다"
  • 김철 기자
  • 승인 2020.12.28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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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정 박사가 들려주는 우리차 이야기 4]

 

강진에 전승된 다산의 전통제다지식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한국 차문화의 중흥조로 평가받고 있다. 정영선 교수는 <한국다문화의 중흥조론(中興祖論)>에서 혜장과 초의선사의 제다법도 다산에게서 나왔다는 주장과 함께 다산 선생의 차문화 중흥조론에 불씨를 지폈고, 이덕리(李德履)의 『동다기(東茶記)』와 다산 관련 자료를 발굴하여 다산학의 새로운 장을 펼치고 있는 정민 교수 또한 다산을 우리 차문화의 진정한 중흥조라고 하였다.

조선의 차문화는 융성했던 고려의 차문화에 비해 상당히 위축되었다. 세종12년(1430) 12월 8일에 쓰인 『세종실록』 기사에 따르면 세종은 역대로 각다법을 시행한 것을 의아해 하면서 우리는 대궐에서도 차를 마시지 않는데, 중국은 어째서 국가가 법으로 금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차를 좋아하느냐고 묻고 있다.

세종의 이와같은 말은 조선 초 퇴조해버린 차문화를 증언하고 있으며,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조선 중기 차문화는 더욱 참담해졌다. 1755년 이운해가 쓴 『부풍향차보(扶風鄕茶譜)』에는 '무장의 선운사에는 이름난 차가 있는데, 관민이 채취하여 마실 줄을 몰라, 보통의 풀처럼 천하게 여겨 부목으로나 쓰니 몹시 애석하다.'라고 적고 있다. 일반 백성들이 차를 모르는 현실을 증언하는 말이다. 1785년을 전후해서 지은 이덕리의 『기다(記茶)』에서도 작설을 약용으로는 사용하면서도 차와 작설이 본래 같은 것인 줄을 몰라 채취하여 차로 만들어서 마시는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이렇듯 쇠퇴한 조선의 차문화가 새로운 활기를 띄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 정약용의 강진 유배로부터이다. 1801년 강진으로 귀양 온 정약용은 18년간 강진에서 지내는 동안 학문을 집대성했을 뿐 아니라 한국 전통제다지식을 체계화하고 실용화하였다. 추사 김정희, 초의 선사 등과 차로 교유하며 차문화를 꽃피웠고, 음다뿐 아니라 직접 제다에 참여하여 자신만의 제다법을 완성하였다.

정약용이 강진 유배 동안 차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유배 전 이미 차에 상당한 조예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부임지를 따라 생활하던 시절에 쓴 「등성주암(登聖住菴)」이나 「하일지정절구(夏日池亭絶句)」에는 정약용이 20세 이전에 차를 마신 경험이 들어있다. 유배 전 정약용이 쓴 음다(飮茶)에 대한 시문은 16편이 있으며, 19세부터 37세까지 20년 이상 차생활을 하면서 당시 왕실과 귀족 및 승려와 선비 계층의 차문화를 체득한 다도의 대가였다.

정약용이 혜장과 처음 만난 것은 1805년 4월이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서 혜장에게 쓴 걸명시에서 덖고 말리기를 제대로 해야 우렸을 때 탕색이 맑다고 하였다. 혜장을 만나기 전 이미 차에 대한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배쇄법으로 차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혜장에게 차를 청한 다른 두 편의 글에서 정약용은 이미 육우의 『다경』과 노동의 다시를 이미 섭렵하였고, 실제로 차를 잘 만드는 방법과 차를 잘 끓이는 방법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약용의 차에 대한 이론적 지식은 차산지 강진으로 유배오면서 실질적인 제다기술로 실용화 되었다.

정약용이 만든 것으로 알려진 차는 장흥 보림사의 죽전차(竹田茶), 죽로차(竹露茶), 만불차(萬佛茶)와 『다신계절목』에서 확인되는 잎차(散茶)와 떡차(餠茶, 茶餠) 등이 있다. 죽전차, 죽로차, 만불차는 떡차였다. 다산에게 있어서 차는 기호음료가 아니라 약이었기 때문에 한약재 법제 방식을 응용하여 만든 떡차를 주로 음용하였다. 다산은 구증구포(九蒸九曝)와 삼증삼쇄라는, 그동안 차서(茶書)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제다법을 완성하였다.

 


구증구포 제다에 대한 기록은 다산이 쓴 「범석호의 병오서회(丙午書懷) 10수를 차운하여 송옹(淞翁)에게 부치다(次韻范石湖丙午書懷十首簡寄淞翁)」, 이유원이 쓴 『임하필기(林下筆記)』 「호남사종(湖南四種)」, 『가오고략(嘉梧藁略)』 「죽로차(竹露茶)」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구증구포 제다에서 공정의 반복 횟수가 증가 할수록 카테킨 함량은 감소하고, 총질소 및 데아닌의 함량은 증가한다고 알려져 있다. 다산은 "지나침을 줄이려고 차는 구증구포 거친다(洩過茶經九蒸曝)"고 하였는데 이는 약리작용이 강한 카테킨 함량은 줄이고 맛에 영향을 주는 총질소 및 데아닌의 함량은 높여 음용하기 좋은 상태로 만든 것이었다.

또한 '구증구포'의 번거로움으로 대신 '삼증삼쇄'를 언급하였는데, 이는 공정이 반복되는 초기에는 카테킨 함량 감소폭이나 총질소 및 데아닌 함량 증가폭이 높지만 4회에서 9회차까지 반복에서는 변화폭이 매우 작아서 3회 반복으로도 소정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잎차는 아주 어린 찻잎을 이용하여 소량 만들어 한철 귀하게 음용하였다. 다산은 곡우 무렵의 어린 찻잎을 따서 비교적 낮은 온도의 솥에 덖어 잎차를 만들었다. 낮은 온도에서 덖어진 차는 찻잎 내 효소가 불활성화 되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발효도와 데아닌 함량이 높다고 알려져 있어 다산이 만든 잎차는 오늘날 고온의 솥에서 덖어 만든 녹차와는 다른 풍미를 지녔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다른 잎차 제다방식은 다산이 해배 후 자신에게 찾아온 두 제자와 주고받은 내용을 적은 「기숙과 금계 두 제자에게 써서 주다(書贈旗叔琴季二君)」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산이 제자들에게 올라오기 전에 이른 찻잎을 따서 말려두었냐고 물은 것으로 보아 채취한 찻잎을 별다른 공정을 거치지 않고 햇볕에 말려 만든 오늘 날 백차와 비슷한 차가 당시 다산과 그 제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산에 의해 완성된 제다지식은 다신계를 통해 강진지역에서 지속되었다. 다신계는 채엽과 제다의 공동생산, 다원관리와 제다법의 표준화로 우리나라 근현대 차산업의 단초를 마련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산이 강진을 떠난 이후 차생산을 업으로 하는 전문집단이 등장한 것을 석오(石梧) 윤치영(尹致英, 1803-1856)은 「용단차기」에서 일러준다. 제다전문집단은 채다와 제다 그리고 차를 판매하는 집단이 공생하여야 한다. 다신계 결성 이후 강진에서는 차의 생산과 판매가 분리되면서 근대적 개념의 차산업이 시작되고 있었다. 1818년, 다산이 해배될 때 만들어진 다신계의 전통은 1930년대 까지 지속되었으며, 강진지역에서 생산된 한국전통차인 금릉월산차, 백운옥판차, 금릉다산향 등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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