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애창곡
[다산로] 애창곡
  • 강진신문
  • 승인 2020.12.14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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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권 _ 수필가

나는 유년시절부터 어머니의 손을 잡고 교회를 다녔다. 성인이 되어 주일이면 습관처럼 예배당엘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신앙이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제자리는커녕 오히려 뒷걸음이다. 

반면에 결혼할 때까지 교회 문턱을 한 번도 밟아본 적이 없었던 아내는 기독교 집안인 내게로 시집와서 억지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지만 믿음이 무럭무럭 자라서 오히려 나에게 하나님을 뜨뜻미지근하게 믿는다며 뜨겁게 믿을 것을 간곡히 권면한다. 그 때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던 성경 말씀을 돌이켜 본다. 성경 말씀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구구절절 귀하고 소중하다. 그런 말씀 중에 내가 특별하게 사모하는 구절이 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이다.

내가 이 구절을 가장 좋아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결혼 직후부터 아내가 학원을 운영하느라 우리 부부는 아들딸을 낳아 30여 리 떨어진 부모님 댁에 맡겨야 했다. 아내와 나는 주말이면 아이들을 보러 부모님 댁에 갔다. 이제 막 말을 배우던 딸이 또박또박 암송했던 성경구절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멀리 떨어져 사는 아들딸이 보고 싶을 때면 그때 그 모습을 떠올리며 기도드린다.

나는 평소 찬양을 즐겨 부르진 않지만 가장 좋아하는 찬양이 있다.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이라는 찬양이다. 이 찬양을 좋아하게 된 깊은 사연이 있다. 30년 동안 직장생활 하면서 가장으로서 아무 준비해둔 것 없이 갑작스럽게 명예퇴직을 했다. 당시 중고등학교 다니던 자녀들의 학교 뒷바라지와 생계를 꾸려갈 일을 생각하면 걱정이 태산과 같았다.

신산한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산을 찾는 것도 괜찮았다. 당일 참가비를 내면 산악회에서 제공하는 관광차를 타고 마음 놓고 등산 할 수 있었다. 아내가 준비해준 도시락 가방을 메고 버스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갔다. 나는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국 산을 누비며 사업 구상에 몰두하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자격증을 취득하여 해외결혼과 관련된 사업 준비에 들어갔다. 인건비를 절감하기 위해서 간단한 영문 서류를 작성하고 의사전달에 필요한 영어회화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했다.

그동안 영어공부를 꾸준히 했지만 비즈니스에 활용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마침 고용안전부에서 실직자에게 재취업을 지원하는 영어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 곳에 하루 7시간씩 6개월 동안 젊은이들 틈에서 영문서류 작성과 회화를 배웠다.

나는 밤낮으로 회화 테이프를 듣고 TV 영어 자막 방송을 봤지만 닫혀있던 입과 귀가 쉽게 열리질 않았다. 6개월 과정을 마치고 순천대학교어학원 중급반에 등록하여 원어민 강사에게 회화를 배우며 그와 친구를 맺어 휴일이면 집에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고 관광지를 함께 다녀봤지만 나의 영어 회화 실력은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고심 끝에 비용이 저렴한 필리핀으로 단기 어학연수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장롱 속에 깊숙이 넣어 놓았던 10여 개의 통장을 손에 쥐고 농협에 들렀다. 창구직원이 한 묶음 되는 통장을 살펴보더니 딱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고객님 중도해지가 너무 아깝습니다. 조금만 기다렸다 만기되면 찾으면 안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말씀은 고맙지만 딱한 사정이 있으니 그냥 처리해 주세요"라고 정중하게 말하며 중도 해지 금액을 받았다.

내가 필리핀으로 떠나던 날 아침 온 식구가 식탁에 둘러앉아 서로 손을 잡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나는 의지할 곳이 아무 곳도 없습니다. 창해일속과 같은 이 몸 일엽편주에 싣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망망대해로 떠납니다. 저희 가정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진정으로 기도하는 심정은 참으로 경건했다. 중학생이던 아들이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자 순간 울음바다가 되었다.

프랑스 문호 빅토르 위고(1802-1885)는 인생을 전쟁에 비유했듯이 나는 전장에 나가는 장수처럼 비장한 각오로 허름한 여행 가방을 밀며 집을 나섰다. 필리핀 마닐라 근교에 있는 어학연수원에서 레벨 테스트를 마치고 수업에 들어갔다. 하숙집에 선교단체를 통해 단체로 온 한국청년 7명이 있었다. 이들은 필리핀에서 기초 어학연수를 마치고 고급 어학연수를 받기 위해 캐나다 또는 미국으로 떠날 계획이었다.

나는 매일 그 들과 함께 아침 찬양과 말씀을 읽고 돌아가며 기도를 했다. 어학원에서 한국, 중국, 일본에서 온 유학생들은 주말이면 남부 민다나오나 북부 바기오 등지로 여행을 떠났다. 나는 청년들과 한인교회 마룻바닥에 앉아 몇 시간 목청껏 찬양을 했다. 수요일 밤이면 택시를 한 시간 가량 타고 한국선교사들이 파견된 개척교회로 가서 찬양예배를 드렸다. 

그 때 내가 많이 불렀던 노래가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이다. 나는 필리핀에 오기 전까지 예수님을 애타게 사모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 또 다시 느슨해진 나의 신앙생활을 뒤돌아보며 그 때 절실했던 믿음을 회복하고 싶다. 이제 그 거친 광풍과 두려움도 말끔히 걷혔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열심히 살고 있다. 지금도 이 찬양을 부르면 차갑고 느슨하던 가슴이 두근거리며 뜨거워진다. 내 생에 가장 힘들었을 때 불렀던 찬양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은 나의 애창곡이기에 영원히 사랑하며 부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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