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애처롭게 시든 꽃잎
[다산로] 애처롭게 시든 꽃잎
  • 강진신문
  • 승인 2020.12.02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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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권 _ 수필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를 유지하던 조선 사회에서 여성들은 자기 정체성을 잃고 남성의 보조적 존재로 살아가야 했다. 반가(班家)의 여성들도 문밖출입이 자유롭지 못해 이름 대신 성씨나 아호로 불리던 사회였다.

그러나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사람과 혼인해서 남편에게 여필종부(女必從夫)해야 한다며 순종의 미덕을 강요받던 시대에 자기 이름으로 시를 쓰며 살았던 여성도 있었다.

한국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펴내 자신의 개혁사상과 이상을 세상에 알렸던 허균의 누이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녀는 허균보다 여섯 살 손위였는데 시문에 재능이 탁월하여 어린 나이에 사서삼경(四書三經)은 물론 역사서 경국대전(經國大典)과 동국통감(東國通鑑)을 통달했다고 한다.

그녀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15세에 안동김씨 김성립(金誠立)과 혼인하여 딸과 아들을 낳았다. 남녀 차별이 뚜렷한 당시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재능이 아무리 특출해도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여자는 모름지기 베를 짜고 남편을 봉양하는 일이 훨씬 가치 있는 일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각자무치라는 말이 있다. 뿔 달린 짐승은 이빨이 없는 것처럼 하늘의 저울추는 공평하여 미와 재능을 겸비한 천재 시인에게 순탄한 삶을 허락하지 않았다. 남편의 잦은 기방 출입과 외도로 부부의 금실이 좋지 않았다. 완고한 시어머니는 한낱 여자가 방구석에 앉아 시(詩) 나부랭이나 짓는다며 구박했다.

설상가상으로 그녀는 두 자녀를 잃게 된다. 사방이 밀폐된 공간에서 바깥세상을 향한 유일한 통로이며 시혼(詩魂)의 불씨를 감싸고 있던 어린 아들 딸을 잃고 뱃속의 태아마저 잃게 되자 깊은 절망에 잠겼다. 핏줄이란 단지 몸 안으로 흐르는 붉은 액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뼈와 살이 분해되어 자라고 있던 자식들은 어미와 연결된 삶을 살고 있었다. 두 자식의 죽음은 허난설헌 자신의 죽음과도 같았다.

그녀는 남편의 외도와 무관심 시어머니의 핍박과 고통을 견디어 내면서도 정작 깨부수고자 하는 것은 남성중심 조선사회의 잘못된 제도였을 것이다. 성리학이란 견고한 주춧돌 위에 세워진 성차별과 억압의 장벽 앞에서 자신의 가슴속에 뭉친 울분을 섬세한 붓끝으로 옮겨 시를 읊었던 것이다.

서양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은 신(神)에게 감사하고 싶은 것은 '첫째는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난 것이요, 둘째는 자유인으로 태어난 것이요, 셋째는 남자로 태어난 것이며, 넷째는 내가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이다' 라고 말하며 스승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평생 후대에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며 살았다.

그러나 조선의 천재 여류시인 허난설헌은 자신의 삶을 불행하게 만든 것은 '첫째는 작은 나라에서 태어난 것이요, 둘째는 남자가 아닌 여자로 태어난 것이요, 셋째는 인품과 시재를 겸비한 지아비를 못 만난 것이며, 넷째는 자녀에게 모성애를 베풀지 못한 것이다'라고  가슴에 맺힌 한(恨)을 표현했다.

중국 당나라 시인 백낙천(白樂天)은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 여자의 몸으로 태어나지 말라. 백년의 고락이 남한테 달려 있다. (人生幕作婦人身 百年苦樂由他人)"라고 읊었다. 여자의 행복의 열쇠를 남편 김성립이 쥐고 있었기에 허난설헌은 타고난 재능과 천분을 발휘할 수 없었다.

사대부 집안 며느리로 살면서 깊어가는 고부간의 갈등, 남편과의 불화, 몰락해가는 친정에 대한 안타까움, 두 자녀를 잃은 슬픔은 그녀를 어둠이 짙은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몸은 극도로 쇠약해지고 정신은 더욱 혼미해지자 그녀는'꿈 속 광상산(廣桑山)을 노닐며 (夢遊廣桑山詩)' 라는 시(詩) 한 편을 썼다.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碧海侵瑤海)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靑鸞倚彩鸞)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 붉게 떨어지니 (芙蓉三九朶)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紅塵月霜寒)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가 떨어진다는 표현대로 스물일곱 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허난설헌은 자기가 죽거든 자신의 작품을 모두 불태워 달라고 동생 허균에게 유언했다고 한다.

그러나 허균은 누이가 세상을 떠난 뒤 그녀의 글을 수집하여 1,606년 중국에서 「난설헌집(蘭雪軒集)」을 간행했다. 그녀의 작품은 여성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았던 시대 탓에 빛을 보지 못하다 훗날 재평가 되어 1711년에는 일본에서 간행되어 많은 지식인과 문인들에게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

천재성을 타고난 비운의 시인 허난설헌은 가부장적 사회를 극복하고자 섬세한 필치와 독특한 감성으로 혼을 자아내었다. 그녀의 시는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음이 못내 아쉽지만 독특한 감성을 녹여 읊은 그녀의 시는 읽을수록 입속에 계속 머금고 싶은 향기처럼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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