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두려움 이겨내기
[다산로] 두려움 이겨내기
  • 강진신문
  • 승인 2020.09.20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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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권 _ 수필가

'경궁지조(驚弓之鳥)'라는 고사가 있다. 화살에 맞은 경험이 있는 새가 활처럼 휜 것을 보면 두려워한다는 뜻으로 한번 혼이 난 뒤에 그것과 유사한 것만 봐도 공포를 느낀다는 말이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속담과도 비슷한 말이다.

내게도 이와 유사한 경험이 있다.  어린 시절 겨울이면 동네 앞 개울물은 꽁꽁 얼어붙었다. 남자아이들은 왕대나무를 반으로 쪼개 앞부분에 홈을 파고 구부려서 만든 대나무스키를 타고, 여자와 작은 아이들은 나무판 썰매를 만들어 탔다. 나무토막 끝에 못을 뾰쪽하게 갈아 만든 송곳 두 개로 양쪽 얼음판을 찍으면 스키는 빠른 속력으로 얼음 위를 달렸다.

형제들 가운데 유별스럽던 나는 어둑한 새벽에 살며시 일어나 냇가로 나갔다. 매끄러운 얼음판 위에 하얀 눈이 살짝 덮여 있었다. 어두컴컴한 빙판 위를 걷다보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엄습해 오는 두려움을 떨쳐내려고 얼음판 위를 잽싸게 달리다 옆으로 넘어져 돌밭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이마와 한쪽 볼에 피멍이 든 것은 물론, 지난여름 동구 밖 팽나무 위에서 떨어져 부러졌던 오른쪽 팔목이 두 군데나 부러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듬해 겨울 나는 또 썰매가 타고 싶었다. 한참 판자를 자르며 썰매를 만들고 있는데,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너 알아서 해라. 똑 같은 어깨가 세 번 부러지면 죽는다. 죽고 싶으면 얼음 타러가고, 살고 싶으면 그만 해라"

내가 죽는다고 생각하니 이제 썰매를 그만타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르고 있던 판자를 내팽개치고 헛간에 앉아 한참 울었다.

그날 이 후 나와 얼음판은 서로 용납될 수 없는 수화상극(水火相剋)이 되었다. 눈썰매장이나 스키장 근처에 가기도 싫었다. 눈길 위를 걷는 것조차 무서워 진눈개비가 날리는 날이면 차를 세워 놓고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성년이 되어 우연한 기회에 서울 유명 백화점 지하에 있는 빙상스케이트장을 보게 되었다. 여름철이라 밖은 찜통더위가 한창인데 찬란한 조명 아래 경쾌한 음악에 맞추어 스케이트를 타는 모습은 별천지처럼 보였다.

스케이트 옷에 안전모를 쓴 반백의 노인이 손자뻘 되는 어린아이와 손을 잡고 트랙 위를 파도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한참 뒤 오십대 중반에 이르러 지인의 권유로 인근 지역 실내 스케이트장을 방문하게 되었다. 어린 학생들과 많은 사람들이 빙판 위를 돌며 스케이트를 즐겁게 타고 있었다. 스케이트 지도자 자격증을 보유한 지인은 넘어지지 않도록 안전하게 잡아 줄 테니 걸어보라며 스케이트 운동화와 안전모를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순간 과거 어린아이와 함께 트랙을 멋지게 달리던 반백의 노인이 생각났다. 빙판 위에 서자마자 겁에 질려 사지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조력자의 부축을 받지 않고서는 한 발짝도 옮길 수 없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조심조심 스케이트 밀기 연습을 시작했다.

그날 이후 수없이 넘어지며 다른 연습생보다 먼저 나와서 꾸준히 연습했다. '매도 맞아본 사람이 잘 맞는다'는 말이 있듯이 얼음판 위에서 실수를 거듭한 끝에 안전하게 넘어지는 방법을 터득했다. 신체의 중심을 잃으면 자세를 낮추면서 손을 멀리 뻗어 미리 넘어지면 안전했다. 연습을 반복할수록 속력은 붙고 몸놀림은 더 유연해졌다.

어느 날부터 나도 얼음판 위에서 달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스케이트 타는 일이 마냥 신기하고 즐거웠다. 급기야 양손을 학의 날개처럼 우아하게 저으며 트랙 위를 자유자재로 달릴 수 있었다. 동호인 빙상대회에 출전하여 쇼트트랙 부분에서 일반부 우승 메달을 받았다. 꿈같은 일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얼음판 위에서 자유롭게 달릴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질 않았다. 빙판 위에 환하게 웃고 계시는 어머니 얼굴이 어른거렸다.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당신의 개구쟁이 아들이 크게 다칠 것을 염려하여 죽음의 공포를 심어주셨고, 그 덕분에 나는 더 이상 몸을 다치지 않고 성장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평생 그러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산다는 것은 그리 현명한 일이 못 된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과감히 극복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제 아들딸이 결혼해서 예쁜 손자손녀가 태어나면 고사리 손을 잡고 스케이트장을 신나게 누빌 수 있는 그날을 생각하면 더 없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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