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기와를 덮은 고려시대 건물 있었다
청자기와를 덮은 고려시대 건물 있었다
  • 김철 기자
  • 승인 2020.08.22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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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청자박물관, ‘고려시대 청자 건축재, 태평정과 양이정’ 특별전 개최

 

고려청자박물관은 고려시대에 청자로 만든 건축재인 청자와(靑瓷瓦)와 청자판(靑瓷板) 유물을 모아 ‘태평정과 양이정’이라는 특별전을 지난 8월 7일부터 개최하고 있다. 청자 건축재를 대상으로 하는 특별전은 국내에서 최초로 개최되는 것으로 전시는 오는 11월 15일까지 이어진다.

국내 최초로 열리는 고려시대 청자 건축재 전시는 작년 고려청자박물관 서쪽 편 건물지 조사에서 ‘大平’명 청자기와가 발굴되면서 기획된 것이다. 고려시대 청자와는 ‘고려사’에 개성에 있었던 양이정(養怡亭) 지붕을 청자와로 이었다는 내용이 있어서 오래전부터 주목을 받아왔었다.

그런데 양이정이 있었던 수덕궁(壽德宮)에는 태평정(太平亭)이라는 정자도 있었는데, 문헌에는 언급되지 않았던 태평정의 청자와 사용을 실물로 입증해주는 중요한 유물이 발견된 것이다. 고려, 조선시대에는 太자를 大자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았고, 조선시대 개경 관련 문헌에 太平亭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한자는 大平이지만 태평으로 읽는 것이 옳다. 태평정과 마찬가지로 양이정의 청자와도 강진에서 만든 것을 사용했을 것이다. 양이정을 뜻하는 養怡 두 글자가 새겨진 기와도 향후 발굴조사에서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역사적으로 자기(瓷器)로 건축재를 만들어 사용한 나라는 세계적으로 고려가 유일하다. 자기 제작기술을 건축재에 접목시키려는 발상의 전환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실험을 거쳐 결국 성공에 이르게 된 기술발전 과정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청자와는 건물의 규모와 지붕의 면적을 정확하게 산출하고, 청자와가 완성되었을 때 수축하는 비율과 무게까지 미리 계산해 크기를 규격화해 제작했다. 청자판 역시 얇게는 0.4~0.5㎝, 두껍게는 2.5㎝이상으로 만들면서도 편평하게 구울 수 있는 기술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청자와 사용이 그동안 최고 권력자만이 누릴 수 있었던 호사스러움의 극치를 보여준다는 관점에서 벗어나 세계적으로 유일한 자기 건축재의 완성과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켰던 고도의 제작기술을 증명하는 문화유산임을 강조하고 있다.

전시유물중에는 강진뿐만 아니라 부안에서 생산한 청자 건축재도 있으며, 강진 월남사지 출토 일반 토제와와 청자와의 크기를 비교해 볼 수 있도록 전시하여 청자와 건물의 모습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여러 가지의 내용을 담고 있는 명문(銘文)이 새겨진 편도 전시하고 있다. ‘大平’과 함께 ‘西樓’가 새겨진 기와도 있는데 이 서루는 고려 왕실의 이궁(離宮)중에 하나였던 장원정(長源亭)의 서루(西樓)이다. 장원정은 1056년에 완공되었으며 이후 여러 왕중에 의종(毅宗)이 가장 많이 행차했었다. 

또 다른 청자와에는 ‘一寸五分’과 같이 숫자와 함께 寸, 分과 같은 길이 단위가 새겨지거나 숫자만 표기된 것도 있으며, 이러한 숫자는 아마도 청자와를 만들 때에 수축률을 나름의 방식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몇 년동안 강진 성전면 월남사지 발굴조사에서는 가로×세로 16.0㎝ 크기로 일정한 크기에 연꽃이 새겨진 청자판이 수십 점 발견되기도 했다. 청자판이 발견된 지점은 금당지로 추정되는 3호 건물지와 현존하는 석탑 남쪽 10호 건물지이다. 아마도 불상이 놓이는 수미단(須彌壇)의 측면 장식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윤성일 고려청자박물관장은 “작년에 발견된 ‘大平’명 청자와는 출토지가 분명하고, 『고려사』 기록을 입증해주는 자료로서 앞으로 고려청자박물관을 대표하는 유물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국내는 물론 세계 최초의 자기 건축재를 성공시킨 우리 선조들의 기술력을 감상할 수 있는 뜻깊은 기회가 될 것이다”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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