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내 고향 향촌에 가면
[다산로] 내 고향 향촌에 가면
  • 강진신문
  • 승인 2020.08.22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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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권 _ 수필가

 

강진읍에서 해남 땅끝으로 가는 길목에 바위산을 따라 길게 늘어진 도로가 있다. 규모가 작지만 아담하게 꾸며진 석문공원을 지나 소재지 끝자락에 이르면 옛날 도암 오일시장이 있다.

해남군 북일면에서 강진읍 일대까지 수많은 장꾼들로 장날이면 북적거리던 시장터는 시대의 흐름 따라 폐허가 되었다.

시장 입구에서 바라보면 '다산 친구 윤서유의 집'이라는 작은 푯말이 있다. 그 곳에서 약 1㎞ 거리에 언뜻 보아도 형세가 근엄하면서 아늑하게 느껴지는 마을이 있다. 나의 태를 묻고, 꿈을 키우며 자랐던 곳이다. 오래 전에는 해남윤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는데 지금은 여러 성씨들이 혼재해 살고 있다.

사철 푸른 대나무와 소나무 숲이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마을 뒤쪽으로는 노송이 우거진 숲이 있다. 등걸이 휘어져 늘어진 소나무 가지에 황새들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 겨울밤이면 솔밭 바람소리와 솔개 울음소리가 창틈 새로 구슬프게 들려왔다. 선잠에 깨어 일어난 밤이면 엄마가 곁에 없다는 사실이 서러워 한참이나 울곤 했다.

마을 뒷산 기슭에 일제 강점기에 신사 참배를 강요하며 우리 민족의 의식을 뿌리째 뽑아 흔적조차 없애려 했던 참배 터가 있었다. 어린 시절 이곳에 모여 윗동네 아랫동네 편을 갈라 공차기를 하곤 했다. 지금은 길이 끊기고 잡목이 우거져 형태를 알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마을 앞으로는 개울물이 흐르고 있다. 고려 시대에는 그 곳까지 바닷물이 들어 왔다고 한다. 여름날이면 아이들은 아른거리는 물살 속에 손을 넣고 돌 밑을 더듬어 새우와 붕어를 잡고, 어른들은 배터리를 짊어지고 돌 제방 틈과 늪을 휘저었다. 전류에 감전된 매기와 민물 장어들이 하얀 배를 뒤집으며 물위로 떠오른다. 걷어 올린 그물망 속에 다양한 물고기들이 들어 있었다. 어른들은 물고기 배를 갈라 손질을 하고 매운탕을 끓여 추렴을 했다.

석양이면 꼴망태를 메고 냇가로 나간다. 냇가 가장자리에 돋아난 풀밭에서 행운의 네잎 클로버를 찾아 헤맨다.

자운영 꽃을 양쪽으로 묶어 손목시계를 만들어 차는 등 해찰을 하다 보면 서쪽 바위산에 해가 뉘엿뉘엿해진다. 햇볕에 달궈진 물속에서 피라미들이 원을 그리며 점프를 한다. 가설극장에서는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시는 면민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러분이 고대하시던 영화가 왔습니다"하고 유혹했다.

밤이면 어린아이에서 어른까지 모두가 냇물로 나와서 미역을 감았다. 개구쟁이들은 여자들만 목욕하고 있는 곳에 몰래 다가가서 처녀들을 놀래 주려다가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친구 누나에게 목덜미를 잡혀 등짝을 얻어맞고 내동댕이쳐지기도 했다.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물놀이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살금살금 다가가 옷을 숨겨놓고 황당해 하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기도 했다. 겨울이면 꽁꽁 얼어붙은 냇가에서 미끄럼을 타고 잔등에 올라 눈썰매를 타고 놀았다.

우수한 광물질이 다량 함유된 이 고장의 바위를 분쇄한 유리 원료를 일본으로 수송하던 선박이 가우도 앞 망호 선착장에 정박했다. 마을 앞을 지나가던 덤프트럭 뒤에 거머리처럼 매달려 선착장까지 가서 일본 화물선 내부를 구경했다. 근해에서 고기잡이하는 소형 어선만 봤는데, 주방과 침실이 딸려있는 화물선은 한나절 구경거리로 충분했다.

아침이면 밥 짓는 연기가 동네 뒷산 대숲에 운무처럼 걸려 있고, 아침을 먹은 아이들이 골목을 가득 메우며 왁자지껄하게 쏘다녔던 골목이 이제는 한산하다.
여느 마을처럼 젊은이들이 없고 노인들만 남아 마을을 지키고 있다.

인간에게 고향이란 어머니의 품과 같아서 꿈속에서도 그립기에 '까마귀도 자기 고향 까마귀는 반갑게 여긴다'는 말도 있다.

내게는 소박하고 작은 꿈이 있다. 내 고향 마을에 작은 도서관을 세우는 것이다. 그 곳에서 어르신들과 함께 책도 읽고 시도 쓰며 지내고 싶다. 나는 고향 향촌에 갈 때마다 씁쓸한 생각을 한다. 입구에 세워놓은 육중한 비석과 악취를 풍기는 축사 때문이다.

그래도 삶에 지치고 힘겨울 때 영혼의 안식처가 되어주고 바로 서지 못하고 방황 할 때 굳건히 지켜주는 고향 마을은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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