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하게 살인 누명 쓰고 살아가는 김은애 이야기
억울하게 살인 누명 쓰고 살아가는 김은애 이야기
  • 강진신문
  • 승인 2020.08.22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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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등 작가와 함께하는 우리동네 옛 이야기 11]
은애전(Ⅰ)

강진군도서관이 지난해 연말 지역의 숨겨진 역사와 문화를 담은 동화책 '우리 동네 옛이야기, 남당포를 지킨 김흥업 장군'을 발간했다. 이번에 발간된 동화책은 강진읍과 관련된 전설과 역사, 문화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책은 지역의 향토사학자인 양광식 강진문사고전연구소장의 감수를 받아 김해등 동화작가가 직접 썼다. 옛이야기 동화중에서 발췌해 게재한다.

조선, 정조 임금 때였어. 어진 임금 때문에 조선은 모처럼 태평성대를 맞았단다.
임금은 백성들을 위하고 백성들은 임금을 높이 받들었지. 그러던 어느 날 나라에 경사가 찾아왔어.

궁궐에 좋은 일이 생기면 임금은 억울한 죄를 짓고 갇혀있는 백성들을 풀어주며 기쁨을 함께 했지. 정조 임금은 대신들에게 명령을 내렸어.
"사형에 처한 죄수들의 명단을 올리도록 하라!"

옥에 갇혀있는 사형 당할 죄수들의 명단이 올라왔어. 관찰사가 직접 조사한 심문조서까지 낱낱이 기록된 문서도 함께 보고가 됐지. 그 중 전라도 관찰사 윤시동이 올린 살인사건 하나가 유독 눈에 띄었어.

정조 임금이 물었어.
"탐진(강진)현의 김은애라는 여인이 안 노파(노인)를 죽인 사건인데, 왜 관찰사 윤시동은 범인을 측은하게 여기고 선처를 바란다고 썼는가?"

"예, 전하. 자신의 더럽혀진 명예를 되찾기 위해 저지른 살인이기 때문에 그런 줄 아옵니다."
신하가 관찰사의 심정을 전하기라도 하는 듯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어. 정조 임금은 내심 놀라는 눈치였어. 이내 관찰사가 심문한 조사 기록을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어.

"흠! 김은애는 여리고 작은 왜소한 여인인데 어떻게 덩치가 큰 안 노파를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단 말이냐?"
"그게 좀 의문이긴 하옵니다."
"혼자가 아닌 공범이 있었던 건 아니냐?"

"전하, 그건 아닌 게 확실해 보입니다. 처음 김은애를 심문한 관찰사 윤행원이 무려 아홉 차례나 캐물었는데 대답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한결 같았다고 하옵니다."

"허어! 도대체 김은애가 살인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더럽혀진 명예가 무엇이란 말인가……."

정조 임금은 첫 장부터 꼼꼼히 읽어보기로 작정하고 촛불 가까이 심문조서를 가져다 댔어. 잔잔하게 일렁이는 촛불에 임금의 얼굴이 환하게 드러났어. 단 한 명의 억울한 백성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임금의 마음이 고스란히 엿보였지. 곁에 있던 신하는 고개를 조아리며 황송해 하였어.

"전하, 밤이 너무 깊었습니다. 어서 침소에 드시옵소서."
"아니다, 백성의 목숨이 바람 앞에 촛불인데 어찌 만백성의 아비라는 임금이 편히 잠을 잘 수 있겠느냐."
"전하……."

신하는 더는 정조 임금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잠자코 기다리기로 했어. 정조 임금은 심문조서를 한 장 한 장 꼼꼼히 읽기 시작했어. 마치 눈앞에서 사건이 벌어진 것처럼 아주 생생하고 자세하게 적혀있었지.

김은애는 탐진(강진)현의 탑동마을에서 살고 있는 양갓집 규슈이다. 혼기를 앞둔 열여섯 살이라 유난히 몸가짐을 조심했다고 한다.

함부로 사람들을 만나거나 허튼 말이나 행동을 삼갔다. 그런 탓에 동네에서는 일등 신부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김은애 집에 자주 들락거리는 노파가 있었다. 바로 안 노파이다. 안 노파는 원래 천한 기생이었다. 입이 험하고 성질도 괴팍했으며 온몸에 심한 종기까지 앓고 있었다.
김은애의 어머니는 안 노파에게 식량이며 물건들을 자주 주거나 빌려주곤 했다.

그러나 가끔은 안 노파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때도 있었다고 한다. 이에 앙심을 품은 안 노파가 김은애를 해코지하기로 작정한다.

어느 날 안 노파는 친척뻘인 최정련이라는 소년을 불렀다. 최정련은 겨우 열다섯 살이었다.

안 노파는 최정련에게 김은애를 아내로 맞게 해준다고 꼬드겼다. 최정련은 동네에서 참하기로 소문난 김은애를 신부로 맞이할 수 있다는 게 꿈만 같았다고 한다.

안 노파는 최정련에게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만일 혼인이 성사만 되면 앓고 있는 종기 치료를 위한 약값을 지불해 달라고 당부했다.

최정련은 김은애를 아내로 삼을 욕심에 흔쾌히 약속을 하고 말았다. 안 노파는 그날부터 동네에 소문을 퍼트렸다.

김은애와 최정련이 안 노파 자신의 집에서 은밀히 만나고 있다가 최정련 할머니께 들통이 나자 혼비백산하여 담을 넘어 도망쳤다는 소문이었다.

발 없는 소문이 천 리를 간다는 말처럼 김은애는 밖에 나다니지 못할 지경에 빠졌다. 혼기가 찼지만 행실이 나쁘다고 소문난 김은애와 혼인하려 들지 않았다. 소문을 믿고 손가락질을 해대며 혀를 차대는 사람들뿐이었다.


안 노파는 김은애가 최정련에게 시집갈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김양준이라는 총각이 김은애와 혼인을 하였다. 김양준은 김은애의 됨됨이를 오래 전부터 봐왔기 때문에 소문을 믿지 않았던 탓이다.

안 노파는 길길이 날뛰었다. 김은애가 김양준과 혼인하는 바람에 최정련이 자신의 약값을 대지 못했고, 그 때문에 종기가 더 악화됐다고 여겼다.
안 노파는 전 보다 더한 나쁜 소문을 퍼트리고 다녔다. 김은애는 이 년 넘도록 안 노파의 해코지에 견디다 못해 그만 살인을 하고 말았다.

"이런……."
정조 임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어. 양갓집 규슈인 김은애의 억울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지. 자꾸만 아버지 사도세자를 두고 손가락질 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떠올랐어.
치가 떨리고 분통이 터져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어. 정조 임금은 버럭 명령을 내렸어.

"여봐라, 당장 우의정을 들라 하라!"
"예이, 전하!"
시중을 들고 있던 환관이 급히 우의정 채제공을 불러 왔어. 채제공은 짐짓 놀란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어.
"전하, 이 밤중에 어인 일이오십니까?"
"경은, 여인네의 정절을 어찌 생각하시오?"
"예이?"

채제공은 정조 임금의 뜬금없는 질문에 잠시 머뭇댔어. 정신을 차린 채제공은 차분하게 대답을 했지.
"여인에게 있어 정절은 목숨과도 같은 거라 여겨지옵니다."

"허허, 과인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렇다면 모함이나 거짓으로 정절을 잃어버린 여인이 있는데……."

정조 임금은 일부러 말끝을 흐렸어. 눈치 빠른 우의정 채제공이 이미 자신의 심중을 간파했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지. 아니나 다를까 채제공은 정조 임금에게 넌지시 되물었어.
"탐진현의 김은애를 두고 하는 말씀이신지요?"
"그렇다네."
"전하! 전하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한 부족한 소신을 벌하옵소서."

갑자기 채제공이 납작 엎드려 고개를 조아리는 거야. 정조 임금은 화들짝 놀라 물었어.
"아니, 공은 어찌 이러시는가?"
"갑자기 하찮은 죄인을 입에 올리신 이유를 잘 모르겠나이다."
"흠!"

임금 정조는 한참을 망설였어. 그러고는 결심이 선 듯 전라도 관찰사가 올린 김은애 심문조서를 환관에게 건네주었어. 환관이 조서를 냉큼 받아서 채제공에게 다시 건넸어.
"짐은 김은애의 죄를 묻지 않으려고 하는데, 공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전하! 그건 절대 아니되옵니다."
채제공이 다시 고개를 조아리며 목소리를 높였어.
"아니 될 이유는 무엇인가?"

"이 심문조서대로라면 죄인 김은애는 명명백백하게 안 노파를 죽인 살인죄를 저질렀습니다. 비록 김은애가 자신의 명예가 더럽혀진 원통함 때문에 비롯된 살인이긴 하나, 법을 어기고도 죄를 받지 않는다면 어느 백성이 법을 지키려고 하겠나이까."

"공은 짐의 말을 들어보라."
정조 임금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조분조분 얘기를 시작했어. 바로 선왕인 영조 임금 때 황해도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지.

그때도 김은애와 같은 억울함을 당한 여인이 자신의 명예를 더럽힌 사람을 죽여버렸어. 영조 임금은 정절을 목숨보다도 더 중히 여기는 그 여인을 치하하며 죄를 묻지 않기로 했던 사건이었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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