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6.25와 워커장군 그리고 164일
[기고] 6.25와 워커장군 그리고 164일
  • 강진신문
  • 승인 2020.06.08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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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용수 _ 강진군향우회 사무총장

올해는 6.25가 발발한지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4시를 기해 3.8선을 무력화 하고 기습하여 3일만에 서울이 무너지고 대전, 대구를 거쳐 당시 인구 40만명에 불과한 부산이 약 1천여일 동안 임시수도가 되면서 정부 주요기관과 피난민, 유엔군 등 100만명이 넘는 혼란스럽고 복잡한 도시로 변하였다.

1950년 7월13일 월턴 워커장군이 주한미8군 (지상군 총사령관) 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전 국토의 5%만 남는 통영, 마산, 대구, 영천 포항을 깃점으로 낙동강 전선(일명:워커라인)이 형성되고 대한민국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서 미군의 참전에도 불구하고 낙동강까지 전선이 밀렸다.

미국내 여론이 악화되고 미군 내부에서도 철수론이 대두되고 영천. 안강전투에서 패배하면 new korea plan 이라는 계획으로 정부요인 및 피난민 62만명으로 한국망명정부를 제주도, 일본, 대만, 서사모아 중에서 검토할(1.4후퇴 때 금강, 소백산 이남으로 밀리면 한번 더 검토한 계획) 정도로 어려운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 "더 이상 물러 설 수도 없고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다",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 까지 한국을 지키겠다""지키느냐 아니면 죽느냐 (stand or die)" 이런 말을 남기면서 악전고투 끝에 45일 동안 사수 하면서 유엔16개국의 참전 병력과 60개국의 전쟁물자가 도착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면서 1950년 9월15일 조수간만의 차가 9m에 딜해확률 1/5,000 이라는 인천상륙작전(한,미 연합군 75,000명/함정 206척 참가)을 성공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월턴 워커장군 이야말로 정말로 대한민국 국민이 감사해야 할 인물이다.

6.25전쟁사에서 비록 맥아더 장군에 가려 덜 알려진 인물이지만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으며 워커장군 가족들 또한 한국을 사랑한 사람들이다.

인천상륙 작전으로 9월 28일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10월1일 3사단 23연대 3.8선 돌파, 10월 19일 국군 제1사단(사단장 백선엽장군, 병력 50%가 전라도 출신) 평양 입성, 10월22일 평북 영변에서 소련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선물한 8기통리무진승용차(1951년 6월 워커장군 미망인에게 선물 / 1982년 한국에 기증현재 사천항공 우주 호국기념관에 전시)를 노획하고 10월 26일 오후 2시15분 (한국전쟁사 참조)국군 6사단 7연대 제1중대 중대장 이대용대위(1975년 월남패망당시 주월한국공사로 10년간 베트남에서 감옥생활을 하였으며 외교경로로 석방)가 한만국경 초산에서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10월 30일 평양시민 환영대회에서 전달할 때만 하더라도 미군들은 크리스마스를미국 고향에서 지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 부풀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1950년11월 팽덕회를 총사령관으로 중공군 50만 인해전술로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1사단6천여명이 전사 또는 동사하고 1.4후퇴에 이어서 밀고 밀리는 한국전쟁을  끝내기 위해 맥아더 장군은 한만국경에 원자폭탄 24개(반감기 90년인 코발트탄)로 핵벨트 계획을 트르만 대통령에게 건의 하였으나 1951년 4월 12일 해임되면서 후임에 리지웨이 장군으로교체된 상태에서 전쟁은 많은 희생이 계속 되었다

워커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북부아프리카 튀니지에서 독일 의롬멜 전차군단을 격파하여 연합군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1944년 6월 6일 아이젠하워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미국, 영국, 캐나다, 노르웨이, 호주, 자유프랑스 등8개국 연합군 15만6천명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제2차 세계대전의 큰 분수령이될 때도 조지패튼 장군과 함께 전차부대를 이끌어 큰 공을 세워 중장으로 진급한 장군이다

6.25당시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 장성의 아들 142명이 참전 하였는데 그중에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아들, 워커장군의 아들 샘워커, 밴프리트 미8군사령관의 아들밴프리트 2세(1952년 4월2일 압록강 부근의 순천 야간 폭격 떄 격추되어 실종)등이 포함된 가운데 35명이 전사했다. 이것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한 케이스가 아닌가?

중공군과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워커장군의 아들 셈워커 대위(보병중대장)에게 1950년12월23일 은성무공훈장을 수여하기 위하여 전선으로 가던중 당시 양주군 의정부읍에서 한국 제6사단 2연대 소속 군속 박경래(춘천출신,당시27세)가 몰고 온 트럭과 충돌하여 현장에 즉사하는 사고가 발생 하였는데 한국 땅을 밟은지 164일만 이었다

종전 이후 미군 지형분석팀이 현장을 찾아서 확인하고 추모하는 한국사람들이 전사표지석을 세웠는데 그 곳이 지금 전철1호선 도봉역 2번출구 건너편에 있음이 보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대노하여 사고자를 포살 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워커장군 가족들의 선처 탄원서로 군형무소에서 3년동안 수형생활을 마치고 풀려났다. 그 해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요인과 미군 수뇌부가 정동교회에서크리스마스 예배를 드릴 때는 눈물 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워커장군의 유해는 아들 샘워커 대위가 부하들만 전쟁터에 두고 갈 수 없다는 간곡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맥아더 사령관의 명령으로 아들과 함께 본국으로 송환되어 앨링턴 국립묘지에 안장 되었으며 샘워커대위는 월남전 참전 등을 거치며 미국 최초 부자가 4성장군이 되었으나 지미카터 대통령의 한국에서 미군 감축계획을 반대하다 전역 하는 것을 보면 워커장군 가족들의 한국 사랑을 알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워커장군의 일화 하나가 있다. 부산 군수창고에서 미군과 한국 노무자가 전투화 하역작업을 하면서 서투른 영어로 한국 노무자가 미군에게 군수품 이름이 뭐야 ? 그러자 잘 못 알아들은 미군이 누가 보내 준 것이냐고 ? 되묻자 한국 노무자가" 응 "이라고 대답하자 미군이 ' 워커'가 보낸거야 했는데 한국 노무자가 물건 이름이 워커인줄 알고 그 때 부터 전투화를 워커라고 불렀다고 한다.

1963년 미군들이 휴가를 일본으로 가는 것을 보고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미군장병 휴양소를 만들었는데 워커장군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하여 서울시 광진구 한강변 언덕배기에 흉상을 세우고 약20만평의 부지에 호텔 등 휴양시설을 짓고 워커힐이라 명명하였으며 1973년 지금의 SK그룹 최종현 회장이 매입하여 호텔등 휴양시설로 운영하고 있다.

어느 덧 70년이 지난 6.25사변 그 때 당시 어려운 시기에 생명을 받쳐 대한민국을 지켜준 미국은 우리 혈맹임을 다시 한번 상기하고 워커장군을 비롯한 5만4천여명의 전사자 20만명의 부상자, 지금까지 한국을 거쳐간 200만여명의 미군장병들의 피와 땀을 생각하는 2020년 6월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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