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낳지 못한 노파의 슬픈 전설
아들 낳지 못한 노파의 슬픈 전설
  • 강진신문
  • 승인 2020.05.31 0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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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등 작가와 함께하는 우리동네 옛 이야기 9]
장군바위(Ⅰ)

 

지금부터 삼백 년 전이었어. 강진 영파리 팔영마을에 자식을 낳지 못한 노파가 있었어. 시집 올 때부터 아들을 꼭 낳아야 한다는 시댁 어른들의 시달림을 받고 살았어. 노파도 어른들의 바람대로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고 싶었지.

하지만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되는 건 절대 아니야. 자식 낳는 건 다 하늘의 뜻이니까 그래. 한 해 두 해, 몇 년이 지나도 자식은 생기지 않았어. 마음씨 좋은 남편은 노파를 내내 위로했지.

"부인, 너무 걱정하지 마오. 그러다 불쑥 생기지 않겠소?"
"흑흑, 죄송해요."

노파는 끝까지 자신을 믿어주는 남편이 고마웠어. 하지만 시댁 어른들의 성화가 높아만 갔지. 노파는 자식을 낳기 위해 안 해본 게 없었어. 용하다는 의원은 죄다 찾아가 진찰을 받았고, 집 몇 채 값의 약도 지어 먹어봤어.

부처님께 손이 닳도록 빌고 또 빌어도 봤고, 효험이 있다는 아들 낳는 약수도 마셔봤고, 돌장승의 코도 뜯어다 갈아 마셔봤어.

그렇지만 이 모든 게 소용없었어. 그렇게 바라던 태기는 이날 이때까지 일어나지 않았단다.

어느덧 노파는 등이 굽고 머리가 허옇게 세고 말았어. 더는 자식을 바랄 수도 없는 나이가 돼버렸지. 노파처럼 나이가 들어 영감이 돼버린 남편도 더는 기다릴 수가 없었어.

이러다 정말 대가 끊겨버리면 죽어서 조상님을 뵐 낯이 없을 것 같았단다. 어느 날 영감은 노파에게 조심스레 의견을 물었어.

"부인, 더는 기다릴 수가 없구료. 더 늦기 전에 첩을 들여야 할까 보오."
"흑흑……."

노파는 뭐라 대꾸조차 할 수 없었어. 대를 이을 자식을 낳지 못한 게 죄라 여겼기 때문이지. 모진 남편이었다면 노파는 진작 쫓겨났을 거야. 하지만 워낙 인품이 좋은 영감이라 지금까지 지켜보고 기다려줬던 거지.

노파는 방을 뛰쳐나와 냇가로 나갔어. 아기가 들어서지 않아 시댁 어른들의 눈치가 보일 때마다 찾아가 울었던 곳이지. 옆집의 젊은 아낙도 빨래를 하고 있었어. 젊은 아낙도 자식이 없는 지 십여 년이 넘었어. 그래서 둘은 서로를 위로하며 하루 하루를 견디고 있었어.

노파는 젊은 아낙을 보자마자 흐느껴 울었어.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몰라. 흑흑……."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하늘도 다 뜻이 있어 그러는 걸 거예요."

아낙은 노파의 손을 꽉 잡아주며 위로했어. 먼 훗날 자신의 모습도 노파나 다름없을 거란 생각에 울컥 눈물이 솟았어. 더군다나 며칠 전 시댁 어른들이 찾아와 남편을 닦달하고 갔거든. 하루 빨리 첩을 보아 대를 이으라고 말이야.

노파는 젊은 아낙이 한 말을 몇 번이나 읊조렸다.
"하늘도 무슨 뜻이 있어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걸까?"
며칠 뒤 노파는 희한한 꿈을 꿨어. 아이를 낳지 못해 소박을 맞고 쫓겨나다가 어떤 바위 위에 다다를 때였는데 갑자기 하늘이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하는 거야. 순식간에 오색구름이 몽글몽글 피어났어.

노파는 넋을 잃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어. 잠시 뒤, 오색구름 속에서 백마가 이끄는 마차 한 대가 내려왔어. 마치 하늘에서 바위 위로 길이라도 깔린 것 같았지. 노파는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어. 마차는 노파가 서 있던 곳까지 달려와 멈추었어. 마차는 온갖 화려한 치장으로 꾸며져 있었어.

하늘의 옥황상제가 타고 다니는 마차처럼 여겨졌지. 노파는 난생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단다. 그때 마차 속에서 사람이 한 명 내려오는 게 아니겠어? 세상을 호령할 듯한 위풍당당한 장군의 모습이었지.

노파는 너무 놀라 환호성을 지르다 그만 잠이 깨고 말았어. 꿈이 너무나도 생생했어. 문득 마차가 내려온 바위가 어딘가 모르게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어.
"어디서 많이 본 듯한데……음, 맞다! 바로 그 바위야."
가끔씩 속이 답답할 때마다 올라가 바람을 쐬던 바위였던 거야.

노파는 헐레벌떡 그 바위를 찾아 올라가봤어.
"에구머니나!"

노파는 하마터면 뒤로 벌러덩 넘어질 뻔했어. 세상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말끔했던 바위 위로 마차가 지나간 자국과 말발굽 자국이 또각또각 나 있는 게 아니겠어?
"꿈이야? 생시야?"

노파는 머리를 푸르르 떨며 한참을 그 바위 위에 서 있었단다. 그리고 몇 번이나 마차가 지나간 자국을 쓸어보았어. 꿈에서 본 마차가 금방 지나 간 것처럼 아주 선명했어.

불쑥 마차에서 장군이 내려와 노파에게 손을 내밀 것 같았고 말이야. 노파는 얼이 반쯤 빠친 채 집으로 돌아왔어.

그 일이 있고 얼마 뒤에 희한한 일이 벌어졌어.
"여, 영감……세상에 이것 좀 봐요."

노파는 배를 어루만지며 영감에게 달려갔어. 영감은 여러 단자들을 살펴보며 첩을 들일 준비를 하느라 바빴지.
"무슨 일인데 그리 호들갑이오?"
"영감, 저에게 태, 태기가 있어요. 아기가 들어섰단 말이에요."
"뭐, 뭐요?"

영감은 화들짝 놀라 노파의 배를 봤어. 노파의 말이 맞았어. 배가 제법 볼록하니 솟아있는 거야. 영감은 믿을 수 없는 일이어서 노파의 배를 만지고 또 만져보았지. 뱃속에서 아기가 꿈틀대는 듯한 느낌도 전해져왔어.

영감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어.
"세상에 이게 무슨 변이오?"
"영감도 참! 이런 경사를 두고 변이라니오!"

노파는 영감을 나무랐어. 그러고는 얼마 전에 꾸었던 꿈 얘기를 해줬어. 쉽게 믿지 못하는 영감의 손을 잡고 마차가 내려 온 바위까지 데리고 가 확인도 시켜줬지.

그제야 영감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좋아 했어. 첩을 보기 위해 고르고 있던 신부 단자도 냅다 던져버렸고 말이야.

그렇게 들뜬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어. 노파 부부는 이런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혹시 부정이라도 타 뱃속의 아이가 잘못될까 봐 염려가 됐던 것이지. 그러던 어느 날 대문 밖에서 청랑한 목탁 소리가 들려왔어.
"시주 좀 부탁드립니다. 나무관세음보살."
"아이고, 스님……드리고 말고요."

영감은 커다란 됫박에 보리쌀을 가득 담아 스님께 시주를 드렸어. 스님의 얼굴에는 도력이 깊이 서려있는 것처럼 보였어. 스님은 한참동안 목탁을 두드리다가 슬쩍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했어.
"허허, 이 집에 영험한 기운이 잔뜩 서려있구려."
"네? 스님, 무슨 말씀이온지요?"

영감은 영문을 몰라 물었지. 노스님은 대문 안쪽을 이리저리 살피며 대답했어.
"그렇게 바랐던 아이가 생기겠군요."
"네? 아니, 스님이 어찌 그걸 아십니까……."

영감은 깜짝 놀라 어리둥절해했어. 스님은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어. 태어날 아이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야. 세상을 호령할 장군감 중에 장군감이라는 거야. 그러면서 한 마디 당부도 있지 않았지.

"범상치 않은 아이는 그만큼 조심해야 할 것들이 있는 법이오."
"스님, 그게 무엇입니까?"
"내 말 명심하시오. 돌이 될 때까지 절대 이름을 짓거나 부르지 마시오. 그리고 누구에게도 보여서는 절대 아니 되오. 알아 듣겠소?"
"네네, 각별히 명심하겠습니다."

영감은 허리를 깊이 숙여 두 손을 모았어. 노스님은 목탁을 두드리며 발걸음을 돌렸어. 영감은 황급히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 노파에게 알렸어. 노파는 배를 어루만지며 목숨을 다해서라도 뱃속의 자식을 지킬 거라 다짐했지.

더군다나 아이가 뱃속에서 노는 게 여간 아니었거든. 정말 장군감이라도 되는 지 요란했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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