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땅 오묘하고 깊은 바둑의 기운 서려 있다
강진땅 오묘하고 깊은 바둑의 기운 서려 있다
  • 강진신문
  • 승인 2020.04.10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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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등 작가와 함께하는 우리동네 옛 이야기 6]
바둑의 신 조정통(Ⅱ)

 

노인도 겸손하게 조정통의 마음을 받아주었어.
"아, 그러지요. 그럼 먼저 두겠습니다."

그렇게 조정통과 노인의 두 번째 바둑이 시작됐어.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어찌나 무겁게 흐르던지 탐진강에서 불어오는 바람마저 수운정을 비켜가는 것만 같았지. 강물 소리와 벼이삭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까지도 잠잠했어.

오로지 두 사람의 바둑알이 바둑판에 놓이는 소리만 간간이 딱딱 낮게 울려 퍼졌단다.

조정통은 '위기십결'을 되뇌고 되뇌며 바둑을 두었어. 신물경속! 돌을 놓을 때 경솔히 빨리 두지 말고 천천히 두라는 비결도 잊지 않았지. 그러면서도 그동안은 두지 않았던 방법으로 노인의 정신을 빼 놓으려는 작전도 썼어.

그렇지만 조정통의 마음대로 바둑 판세는 흘러가지 않았어.
'흠! 바둑을 두면 둘수록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으니…….'

조정통은 노인 모르게 고개를 흔들며 혼잣말을 했어. 마치 두 눈이 없는 상태인 것처럼 깜깜하니 시간이 갈수록 바둑을 더듬더듬 둘 수밖에 없었던 거야. 아무리 원인을 찾으려고 해도 감히 잡히지 않았어.

조정통은 하는 수없이 원나라의 왕과 두었을 때를 떠올렸어.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조정통 만의 묘수를 두었어. 그러면서 슬쩍 노인의 눈치를 봤어. 노인은 조정통이 둔 묘수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런 표정도 없이 대수롭지 않게 바둑을 두는 거야. 어쩐지 노인이 원나라 왕처럼 그 묘수를 모르는 듯했어.

조정통은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며 낮게 외쳤어.
"자, 이런 수는 어떻습니까?"
"……."

노인은 묵묵히 바둑판만 지켜볼 뿐 딱히 대답을 하지 않는 거야. 조정통은 드디어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어. 그러고는 마지막 묘수 한 알을 더 두었지.
'딱!'
조정통이 내려놓는 하얀 바둑알 소리가 요란한 듯 크게 들렸어.

"허허허."
노인이 난데없이 웃음을 터트렸어. 가볍게 팔짱을 낀 채로 바둑판을 지그시 내려다보면서 말이야.

"하하하! 이제 어떡하실 겁니까?"
조정통이 넌지시 노인의 대답을 재촉했어. 노인은 조정통을 바라보며 빙긋 웃으며 대답했어.
"한 판에 묘수가 세 번 나오면 진다고 들었습니다."
"……."
조정통은 고개를 우르르 떨며 눈을 치켜떴어. 그러고는 바둑판을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단다.

"헉, 이럴 수가!"
그제야 바둑판이 제대로 보였어. 답답한 판세를 뚫기 위해 무리한 수를 연거푸 두었던 자신의 실수가 한눈에 들어왔던 거야. 조정통의 얼굴은 금세 붉으락푸르락해지며 금방이라도 분통이 터질 것만 같았어.

"잘 두고 갑니다. 내일 또 들르겠습니다."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처음 왔던 길로 뚜벅뚜벅 걸어갔어.
누운 갈대가 내어준 길을 따라 탐진강 쪽으로 가는 거야. 조정통은 자기도 모르게 노인의 뒤를 밟기 시작했어. 아무래도 나룻배나 젓고 다니는 뱃사공은 아닌 듯싶었거든.
노인은 탐진 강둑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어.

'꿀꺽!'
뒤를 밟는 조정통의 목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어. 노인은 조정통이 뒤를 밟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강둑을 따라 바다 가까이 갔어.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다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는 거야.

"저, 저……저거……."
조정통은 기가 막혀 노인을 부를 엄두가 나지 않았어. 노인의 몸은 깊어지는 바다 속으로 점점 잠겨갔어. 그때 없던 꼬리가 길게 생겨나 물살 위로 뻗어 좌우로 흔들리더니, 노인의 머리가 어느 새 용의 머리를 하고 있는 거야.

"헉! 요……용이었네, 해룡이었어!"
조정통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렸어. 그 사이 용으로 변한 노인은 물속으로 모습을 감춰버렸고, 소용돌이치는 물살이 바다 한가운데로 멀어지다가 사라져버렸단다. 조정통이 바다의 용과 바둑을 두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어.

"'해룡위기'라는 말 들어봤는가?"
지난 번 쟁기질하던 농부가 물었어. 담뱃대를 입에 물고 사는 농부에게는 도통 어려운 말이었어.

"자네 말은 당최 모르겠다니까."
"허허, 해룡하고 바둑을 두었다는 얘기 말이야."
"아! 조정통 나리가 바다에서 나온 용하고 바둑을 둔 거?"
"그렇다네, 그게 바로 '해룡위기'라니까. 지금 그 소문이 전국으로 퍼져나가고 있다고 하는구만."

쟁기질하던 농부는 수운정을 바라보며 말했어. 얼마나 바둑을 잘 두었기에 바다의 용까지 바둑을 두고자 했을까 하며 놀라워했어. 담뱃대를 문 농부도 수운정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랐어.
"조정통 나리가 정자에 앉아 있네!"
"쉬이, 입 조심 하게나. 그날 이후로 나리께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바둑판을 앞에 두고 해룡을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
"허어……."

담뱃대를 문 농부는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흔들었어. 두 농부는 일부러 마을 쪽으로 발길을 돌렸어.

그러면서 이런 저런 바둑 얘기를 나누었지. 조정통 나리가 강진으로 내려와 수운정을 짓고 바둑을 두며 지내는 이유가 바로 강진 땅에 오묘하고 깊은 바둑의 기운이 서려있어서 그렇다는 거야. 분명 먼 훗날에 바둑의 신이라 불리는 조정통처럼 훌륭한 바둑인이 태어난다는 말도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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